자기를 허깨비임을 깨닫고 버리면 마침내 여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그때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만약 색신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함이라 능리 여래를 보지 못한다.
여래는 본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의 본래성품인 불성(佛性), 이른바 자성불(自性佛)을 본다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대우주의 모든 신과 부처님 법신을 또한 보는 것이다.
색신(色身)으로 나를 본다는 것은 색신(色身)을 내세워서 여래를 보기 위해 애쓰고 수행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가능할뿐더러, 수행과정에서 마구니의 많은 유혹 내지 공격을 받기 때문이다.
여래를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야 모든 신앙인들의 공통된 희망이자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이기도 한 바이지만 안타깝게도 그 마음은 중생의 마음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또한 여래의 모습을 색신(色身)으로 상상하고 있다면 마구니가 그것을 이용해서 그 모습으로 나타내어 홀리게 되고 결국 사도(邪道)로 빠지게 된다.
수행과정에서 여래의 어떤 모습이든 색신(色身) -자기가 상상하는 모든 일체의 모습들- 으로 상상하지 말고 또한 그런 것을 일체 비워버리고 정진해야 하는 것이다.
음성(音聲)으로써 나를 구한다는 것은 수행과정에서 들리는 모든 아름답고 거룩한 말에 속아 넘어가는 것을 말한다.
아름답고 거룩한 소리라는 것은 수행자에게 들으면 기분 좋은 그런 소리이다.
부처가 나타나서 세상을 구하라고 한다거나, 중생을 구제하라고 한다거나, 깨달은 것이라는 수기를 준다거나, 내가 깨닫게 해 주겠다거나, 내가 일을 도와주겠다거나, 세상의 왕이라거나 하는 등등의 소리를 한다면 이는 100% 마구니의 유혹임을 알아야 한다.
그런 소리에 귀가 솔깃해지면 그 순간 사도(邪道)로 빠지고 만다.
이것은 수행자를 과대망상(誇大忘想)에 걸리게 하여 타락시키는 전형적인 마구니의 유혹인데, 자기 자신의 내면에 그런 것을 담고 있지 않아야만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앞에서 석가모니께서 무아(無我), 무인(無人), 무중생(無衆生), 무수자(無壽者)로 일체 선법(善法)을 닦아라고 설하신 것이다.
그러면 마구니의 이런 유혹에 100% 넘어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세속에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인정받지도 못하여 열등감에 가득 차서 그것을 보상하는 심리로 수행하는 사람, 그리고 세속에서 자기가 물질적 욕망 이상을 채우지 못하는 것을 알고 이 세계에서 정신적, 영적 욕구 등을 채우려는 사람, 또한 세속을 혐오하여 이 세계가 자기가 피하는 도피처이고 구제받는 세계로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세속적인 욕망을 다 채우고 이 세계에서 정신적인 욕망까지 채워 자기를 완전하게 만들고 자랑하려는 과시욕 강한 사람이다.
신앙의 세계에서 자기 세속의 욕망을 대신 채우려는 사람은 반드시 사도(邪道)로 빠지게 되어 있다.
그리고 반드시 마구니의 유혹이 다가와 신세망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진리(眞理)의 세계는 무엇을 얻는 세계도 아니고, 자기의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세계도 아니고, 오히려 진리와 어긋나 있는 자기 자신의 그런 상(相)들을 버려가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버림으로써 큰 자유를 얻는 세계인데, 여래나 깨달음, 또는 거룩한 자기 모습 등을 상상하고 얻고 되기를 원하면서 수행하니 지옥에 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사도(邪道)는 곧 지옥(地獄)이다. 왜냐하면 언제 다시 원위치로 돌아올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수렁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이 설법은 곧 처음에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고 수행을 해야 할지를 직설적으로 알려주시는 설법이다.
여래를 상상하고 그리워하고, 자기의 그런 모습을 찾기를 원하고, 세속에서 얻지 못한 자기 가치를 이 세계에서 충족시키고자 하는 등의 일체의 그런 아상(我相)을 완전히 떨쳐내고서 신앙생활이나 수행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무엇을 얻고 무엇이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을 원하는 자기 자신을 곧바로 버려가는 것이 깨달음의 길로 가는 것임을 알려준다.
길 없는 길이란 무엇인가?
목적지가 없는 길이기 때문에 그렇다.
목적지를 마음속에 품고 그곳을 생각하며 가는 길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이미 마음속에 길을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길 없는 길이 아닌 것이다.
그럼 무엇인가?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가다 보면 자기가 마땅히 처음부터 있어야 할 곳에 도달하고, 그곳에 도달해 보니 자기 본래 모습이 이미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길을 왔던 자기 자신은 허깨비임을 깨닫고 미련 없이 버리는 것이다.
그런 사람만이 마침내 여래를 보고 여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된다.
**이 구절은 부처님과 나의 본래능력인 영적 능력과 신통력을 부정하려는 승려들의 음모에 의해 후대에 살짝 첨가된 말이므로 일체 무시해야 합니다**
***누구나 부처님의 모습을 보고 음성을 들어야 하는데, 이것이 영적 능력으로서 천안통이고 천이통이며 신통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