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상(我相)을 없애야지'하는 생각 자체가 아상을 강화시킨다.
수보리야, 네가 만약 이런 생각을 하되, 여래는 구족한 상을 쓰지 않는 연고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하느냐.
수보리야 여래는 구족한 상을 쓰지 않는 연고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생각을 하지 마라.
물질세계에서는 시작과 끝도 있고 끊어짐도 있고 소멸도 있지만, 영혼세계에 들어가 보면 그런 것도 없다. 잠깐 육안에 비치지 않을 뿐이다.
부처님의 끈기는 가히 초인적이다. 지금까지의 상(相)에 대한 설법으로 충분한 이해를 하게 해 주셨지만, 끝까지 상(相)에 대한 티끌만 한 오해를 가질까 봐 그것마저 불식시키고자 또 상(相)에 대한 말씀을 꺼내신다.
이것은 우리 중생들이 그만큼 상(相)에 푹 절어 상(相)에 중독되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치 마약중독자에게 마약의 해악을 아무리 강조하고 반복해서 일깨워주어도 조금도 지나치지 않은 것과 같은 것이다.
여래의 구족상(具足相)은 같은 상(相)이라는 이름을 붙이지만 우리 중생상(衆生相)과는 많이 다르다.
여래상(如來相)은 완전히 중립적으로서 상(相) 그 자체에서 나오는 독자적인 인식이 없다. 오로지 법체(法體)의 대자대비를 베푸는 등 용(用)을 위한 방편 내지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중생상(衆生相)은 모든 상(相)에서 나오는 인식으로 나를 삼아 존재하고, 그 상(相)이 요구하는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으로써, 중생의 본래모습인 법체를 가리고 덮어 버리는 망상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른바 상(相)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있다.
이렇듯 갚은 상(相)이라도 천지차이이고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니는데, 여래가 상(相)을 떠난 것이라는 설법을 쭉 하니 우리 중생들은 그 상(相)이라는 것에 대해 마치 나쁜 물건 취급하는 인식을 또 가진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여래가 상(相)을 갖추지 않는 것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지적해 주시는 것이다.
여래의 상(相)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 못 얻고 하는 문제에 있어서 아무런 상관이 없다. 상(相)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상(相)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다.
우리 중생의 상(相)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로부터 멀어지게 하는데, 그것은 상(相) 그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상(相)을 자기 존재로 착각하는 데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들이 상(相)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는 그 순간 상(相)에 지배당하게 된다.
'아상(我相)을 없애야지'하는 그 생각 자체가 아상(我相)을 강화시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