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심이 금강경을 설하는 보살과 듣는 상대방 사이를 흘러다니게 설해야 한다
어떻게 남을 위해 연설하는가.
상을 취하지 않고 여여히 움직이지 않으니라
보살심을 발한 선남자선여인이 금강경 등 사구게(四句偈)를 타인을 위해 설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가르쳐주신다.
근본이치를 알아도 색(色)의 차원에서 중생구제를 위해서 법을 펼칠 때 '운하(云何)', 즉 '어떻게(How)'라는 것이 참 중요하다.
그래서 방편(方便)이라는 것 역시 진리의 실천인 용(用)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특히 법보시(法布施)의 경우는 말 한마디가 상대를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으므로 이타적인 마음만으로 완성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금강경을 법보시할 때 두 가지 핵심 사항을 지적해 주신다.
하나는 상(相)을 취하지 말고, 다른 하나는 여여(如如)하게 움직이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첫째, 상(相)을 취하지 말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금강경 뜻을 펼칠 때 상대방이 나타내는 겉모습 내지 표상(表象)에 따라가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나 자신도 사상(四相)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고통스러워하는 상대방의 상(相)을 따라가면 자기 자신도 같이 고통에 빠질 뿐이고, 금강경을 흙탕물에 던지는 것이 된다.
또 공부하는 학인의 상(相)을 따라서 금강경을 해석해 주면 그 사람은 금강경으로 황금갑옷을 두르고 자기의 어두운 아상(我相)은 더욱 속으로 숨어들어 오히려 독(毒)이 되고 만다.
그리고 금강경 뜻을 해석할 때 법상(法相)을 가지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럼 무엇을 취해야 하는 것인가?
상대의 무념(無念)을 취해야 하는 것이다.
성철스님이 친견받기 전에 3,000배를 반드시 하도록 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그래서 재보시(財布施)는 따뜻하게 느껴지는 자비이고, 법보시(法布施)는 한없이 차갑게 느껴지는 자비이기도 한 것이다.
둘째, 여여(如如)하게 움직이지 말고 금강경을 설해야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여여하다는 것은 밝은 광명을 가진 내 영혼을 중심으로 모든 것이 몸으로 나올 때를 의미한다.
상대가 가지는 고통의 흐름을 멈추어주기 위해서는 진리의 둑을 쌓아야 된다.
왜냐하면 중생이란 한 번 고통에 빠지면 그로 인해 팔만사천가지 번뇌망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서 끝이 없이 존재 자체와 흘러가며 표류하게 되는데, 일단 그것부터 멈추어주어야 고통에서 정신 차려 빠져나올 수 있는 지혜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 둑이 흔들거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힘이 빠지면 끝난다.
그러니 금강경을 연설하는 것은 바로 그 무너지지 않는 둑을 쌓아주는 것이다.
그렇게 해주려면 자기는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금강심(金剛心)을 가지고 있어야 되는 것이다.
그 금강심은 대비심(大悲心)을 품고 있으면서 또한 금강이기 때문에 언제까지나 여여하게 되는 것이다.
금강경을 연설할 때의 부동(不動)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뜻인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니 금강경을 연설할 때 자기 마음의 문을 딱 닫아걸고 금강경 내용만 상대에게 설해주는 것이 되기 쉽다.
부동(不動)은 움직이지 않는 어떤 실체가 있다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에 걸리지 않으니 움직일 것이 없는 법이니 마치 허공(虛空)과 같은 상태를 뜻한다. 여기에는 모든 것이 흘러들어오고 흘러나가는데, 이 부동심을 통과하면서 모든 것이 자비롭게 되고 지혜롭게 되고 안락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의 고통스러운 마음이나 삼독심(三毒心)이 나에게 전해올 때 오염되지 않게 되는 것이 바로 부동심이다.
또한 나의 금강심과 평등심과 자비심인 불심(佛心)이 상대에게 흘러들어 가는 것이다.
마음은 물과 같아서 흘러 다녀야 된다.
마음이 고여 있으면 굳어지고 썩어 악취만 풍긴다.
불심(佛心)이 금강경을 설하는 보살과 듣는 상대방 사이를 흘러 다니며 각자의 상(相)을 뛰어넘어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중생심을 깨끗하게 정화(淨化)시키는 것이다.
금강경을 연설하는 상(相)을 가지고 듣는 상대에게 다가가면 충돌만 일어난다. 상(相)과 상(相)은 늘 부딪치며 불꽃만 튀기는 것이다.
그 가운데 부동심(不動心)이 있어서 상(相)과 상(相) 사이에서 필터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이 바로 금강경을 연설하는 법이다. 조금만 정신 차리면 금강경을 연설하는 것이 너무나 쉽지 않은가?
그런데 내가 본래 상(相)이 없는 존재임을 비로소 알았는데, 그러면 도대체 나의 어느 곳에 이 금강경을 수지하고, 나의 무엇이 독송하며, 남을 위해 연설하는 존재는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