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할 때 법상이라는 위선을 내지 않아야 한다
수보리야, 말한 바 법상이란 여래가 설하되 곧 법상이 아니고 그 이름이 법상이니라
우리가 이러저러한 법상(法相)을 가지고 법을 찾거나 깨닫거나 이루거나 하는 등등의 행(行)을 한다면 그것은 확률 제로에 도전하는 일이다.
세상에는 크고 작은 기적들이라도 있는 법이지만 이렇게 하는 것은 기적조차 전혀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허망한 중생의 희망으로 끝나고 만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만일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우리는 영원한 불행을 피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내가 있고 대상으로서의 법(法)이 또 있다면 법을 찾든 말든 나 자신은 지금 모습과는 진실로 달라질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내가 수천억이 있다고 나 자신이 달라지는가?
돈은 나 자신에게 있는 소유물이지 나라는 존재 그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힘을 넘어서는 소유는 존재를 질식시켜 버린다.
이렇듯 내가 있고 법이 있다면 그 법에 의해 나는 오히려 망가져버리게 된다.
그래서 누구나 법을 찾고 얻고 이룰 수 없는 이유는 그런 공포심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진리가 아니던가?
진리가 드러나면 자기 자신의 가식적인 모습이 낱낱이 드러나니 어디 숨 쉬고 살 수 있겠는가?
그래서 범부들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할 때 법상(法相)을 내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진리가 나 자신과 따로 떨어져 있기를 무의식적으로 바라기 때문이다. 공포심 때문에.
그러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할 때 법상(法相)을 내는 것은 위선(爲善)이 되므로 거창한 법상(法相)으로 자기 자신의 어두움을 포장하지 말아야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할 때는 태양이 환히 비추어서 나 자신의 더러운 모습들이 타 존재에게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되는 것이다.
반야심경에서 무유공포(無有恐怖)라고 친절하게 일러주는 것은 우리의 본래 모습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법(法)을 대할 때의 올바른 마음자세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법상(法相)을 내지 말고, 무소득심(無所得心)을 가지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라고 하시는 것이고, 법상(法相)은 이름뿐인 것이라고 우리를 안심시켜 주신다.
불교는 무언가를 특별하게 만들어서 그것을 법이라고 이름 붙이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이 우주 일체에 대해 그냥 실상을 가르쳐주는 것이므로 불교는 지혜와 진리 그 자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