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을 내지 말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면 따로 구할 것이 없다
수보리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자는 모든 법에 응당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며 이와 같이 믿어서 법에 대한 상을 내지 말아야 하느니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는 그 순간 저절로 가지게 되는 것이 바로 법상(法相)이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면서 동시에 법상(法相)은 가지지 말 것을 주문하신다.
이른바 초발심(初發心)이 곧 변정각(便正覺)이 되도록 하라는 말씀인데, 중생의 상(相)을 가지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니 법상(法相)을 가지지 않을 수 없고, 법상(法相)을 가지니 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올바로 가지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이렇든 저렇든 참 곤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법상(法相)이란 법 내지 진리의 모습에 대한 인식을 말한다.
그 가운데 가장 큰 법상은 '법이 있다, 없다'는 등 '~~이 있다 또는 없다'는 유(有)와 무(無)에 대한 상대적인 인식이다. 이것은 눈을 가리고 아무것도 없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다음에는 '법'이 이렇다, 저렇다고 나름대로 상상하는 것이다. 이것은 눈먼 사람이 허공이 이렇게 생겼다, 저렇게 생겼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다음으로는 '법'을 나 자신과 따로 밖에 있는 대상으로 설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진리를 성취하고 깨달음을 얻겠다는 등의 생각이다. 이것은 허공에 손을 휘저으며 바람을 붙잡겠다는 것과 같다.
또한 그와는 반대로 '법'을 나 안에 있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 안에 들어가서 법을 찾아 헤매게 된다. 물속에서 물을 찾는 격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법상은 '나'와 '법'이 하나로 되어 있다는 인식이다. 이른바 일합상(一合相)에 대한 인식이다. 이것은 물과 물을 합쳐놓고 처음에 있는 그 물만 따로 분리하는 격이다.
또한 이와 유사하게 '내가 있다, 없다'하는 인식이다. 이른바 법을 찾는 대상인 '나'를 법과 동일선상에 놓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허수아비를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나 사람을 허수아비로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외에도 많지만 대략 이런 정도의 법상(法相)을 나름대로 가지고 있다.
실상에서 보면 아는 소견이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 근본이유는 주관과 객관의 상대성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즉 객관의 전체실상을 그대로 투과해 버리기 때문에 놓치는 바가 없다. 그래서 보는 것과 아는 것이 동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법상(法相)을 내지 말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라고 하는데, 사실 그것이 정답이다.
문제는 여전히 나 자신인데, 무엇이든 정해놓고 그것을 얻고 취하려는 못된 습성이 오랜 세월 완전히 익은 탓에 습관적으로 법에 대한 인식도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똑같이 가지는 것이다.
법조차도 있다고 생각하고 내 것으로 딱 정해놓고 얻어야 되는 대상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아예 처음부터 발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왜 그렇게 해요?'라고 따지는 그 습관부터 우선 좀 씻어버려야 올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할 수 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참으로 어려운 것을 부처님께서 잘 알고 계신 터라 지금까지 설한 바를 잘 알고 보고 믿고 이해하라고 당부하신다.
이렇게 법상(法相)을 내지 않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는 사람이라면 알고 보고 믿을 것이 따로 무엇이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