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견(正見)을 가지면 샛길에서 헤매고 있어도 결국 큰길에서 만나게 된다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부처님이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을 말하였다고 한다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사람은 나의 말한 바를 이해하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 사람은 여래의 말씀하신 뜻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누가 뭐라고 간섭할 수 있는가?
이 생각이 바로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이다.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을 가지고 사는 것의 최종결과는 무엇일까?
바로 탐진치(貪嗔痴)의 생성과 더불어 그에 따른 고통의 연속이다.
탐(貪)은 내가 원하는 모든 것에 대한 마음이다.
진(嗔)은 내가 원하지 않는 모든 것에 대한 마음이다.
치(痴)는 내가 원하고 원하지 않는 것을 내 마음대로 정하는 것이다.
이런 나의 탐진치(貪嗔痴)는 외부의 악(惡)과 마장(魔障)을 끌어들이고 -탐진치 자체가 악(惡)이니까 인연에 의한 당연한 사실이다- 더욱 큰 탐진치를 만들어 결국 영원한 굴레에 빠지게 한다.
이것은 자기 존재와 법(法)과 연기(緣起)를 무시하고 진리와 자신을 동떨어지게 함으로써 당연하게 고통과 생사(生死)가 나타나게 된다. 즉, 혼자 철저하게 고립되어 제멋대로 사는 결과이다.
자기 자신과 법과 신(神)과 일체 타 존재를 모두 마음속에 받아들여 전체를 기준으로 삼아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바로 정견(正見)이라고 한다.
정견(正見)을 가지게 될수록 기존의 탐진치 삼독(三毒)은 점차 소멸해 가면서
탐(貪)은 나 자신에게서 벗어나 모두를 고통에서 벗어나 잘 살게 구제해 주겠다는 자비심(慈悲心)으로 전환되어 가고,
진(嗔)은 이 사바세계의 윤회를 벗어나는 원력(願力)이 되어가고,
치(痴)는 중생구제를 위한 지혜(智慧)와 방편(方便)으로 화하게 된다.
'부처님께서 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을 말하였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부처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부처님께서 중생은 이런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다'라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반야를 보고 얻어 지혜를 깨달아 스스로 보리과(菩提果)를 증득하라고 하셨지, 중생에 대해 설하신 것이 아니다.
이미 일합상(一合相)을 이루고 있는 것이 우리의 집합적인 모습이고, 또 그 속에서 개별존재를 찾는 것인데,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을 가지고 있는 중생은 제 멋대로의 관념일 뿐 이미 말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다.
이 얼마나 다행인가?
만약 우리가 일합상(一合相)을 이루고 있지 않다면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을 가지고 있는 개별존재는 영원히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헤매게 된다.
마치 길이 사방팔방으로 이어져 있어서 샛길로 빠지더라도 빙빙 돌다 보면 결국은 큰길로 나오게 되어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큰 길이 중요한 것이지, 그런 샛길에 의미를 둘 필요는 없는 것이다.
내가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그런 인식 자체가 불가능한 것을 얻겠다는 것과 같다.
내 마음대로 생각한다고 하지만 그 생각은 자기 존재와 일합상(一合相)이 연결되어 있는 곳에서 나오는 것이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겠다지만 물리적 법칙의 지배를 벗어날 수는 없다.
따라서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라는 인식은 망상이고 착각이고 꿈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을 따로 설하신 것이 없다. 본래 그런 것은 없는 것이기 때문에 너무나 당연하다.
이 얼마나 고마운가?
지금 비록 샛길을 헤매고 있지만 결국은 큰길을 만나게 되어 있으니까 우리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힘을 낼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