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합상은 이미 자기 영혼에 모두 갖추고 있다.
수보리야, 한 덩어리의 모양이란 곧 이를 말할 수 없거늘, 다만 범부들이 그 일에 탐착할 뿐이라
이렇게 범부가 아닌 대장부는 천상천하유아독존으로 되어 일합상(一合相)을 이루고 있는데, 범부는 그렇게 되지 못한 상태에서 막연히 하나의 진리를 찾아 헤맨다.
그 일합상(一合相)을 찾으면 또 자기 자신이 뭔가 대단한 존재가 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그 일합상(一合相)은 이미 자기 영혼에 모두 갖추고 있거늘, 밖의 일합상(一合相)을 찾아 헤맨다.
또한 자기 안의 일합상(一合相)을 찾는다고 하면서 실제의 모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관념(觀念)으로 만들어 놓은 그 일합상(一合相)을 찾아 헤맨다.
급기야 일합상 안에 갇혀서 자기 영혼을 진리의 굴레에 동동 동여매고 만다.
진리가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한다는 것은 대장부에 해당되는 말이지, 일개 범부에 해당되는 말이 아닌 것이다.
범부는 무엇인가를 상상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왜 그런가?
바로 상상하는 자기 자신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범부는 수행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좋은 경우도 많다. 그냥 세상살이나 열심히 하면 된다. 차별상(差別相)에 따른 열등의식을 견뎌내지 못하는 것이다.
차별상에 따른 열등의식이 없는 사람이 대장부로서 진정한 일합상(一合相)을 이룬다.
일합상(一合相)이 가장 이상적으로 구현되어 있는 것이 바로 만다라(曼茶羅)다.
만다라(Mandala)는 우주와 이 속의 모든 존재들, 즉 모든 불보살(佛菩薩)과 신(神)들, 그리고 아무리 보잘것없는 존재조차도 일체 진실이며 각자 모두 일체 제법(諸法)을 원만하게 구족하고 있어 이들이 모두 신성한 공간 속에서 일체화되어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는 각자의 존재가 가장 높은 이상(理想)을 구현하고 있으며, 독존성(獨存性)을 가지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완벽하게 조화와 통일을 이루고 있다.
즉, 서로가 서로에게 본질(本質)과 작용(作用), 이 양자를 완전하게 구비하도록 보조해주고 있으며, 색(色)과 공(空)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다양한 양상들을 포섭하면서도 체계적 통일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혼란이 일어나지도 않으며, 독재(獨裁)로 흐르지도 않는다.
성인(聖人)은 자기 자신을 만다라로 만들어가지만, 범부(凡夫)는 만다라를 생각하며 자기만족을 위한 대상으로 삼고, 내 소유로 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범부는 자기와 하나가 되지 않으면 배척하거나 혹은 이기적으로 자기 자신만을 중심에 두고 생각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