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행을 하든 간에 그 결과는 나 자신과 본래부터 상관없는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세존께서 말씀하신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은 곧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이 아니고 그 이름이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입니다
내 생각대로 내 마음대로 산다고 할 때, 정말 그렇게 될 수 있다면 그것도 나름대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렇게 하다가 불행을 만나도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다가 그렇게 되었으니 반드시 후회할 일만은 아닌 것이다. 마치 짧고 굵게 살고 가더라도 자기가 그렇게 원한다면 그 나름대로 괜찮다.
그런데 우리는 중생이라서 미련한지, 미련해서 중생인지 좀 미진한 면이 있다.
내가 살면서 크고 작은 많은 결과들을 낳게 되는데, 그 결과들은 내가 원하는 대로 되는지 아니면 정반대로 되든지 간에 나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생각과 행동은 내가 하는 것이고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니 나 자신의 개별적인 행(行)이 되지만, 그 결과들은 수많은 다른 많은 사람들을 비롯한 유형무형의 요소들이 서로 얽혀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슨 행(行)을 하든 간에 그 결과는 나 자신과는 본래부터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인데,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분노하고 자기와 타인을 공격하고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만다.
그것은 타인을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들이 나의 것, 내 삶의 의미 등으로 설정해 놓은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이 바로 그렇게 자기 자신을 망가뜨리는 것이다.
범부일수록 결과에 자기 존재 전체가 매여버린다. 결과에 대범해질수록 대장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집착하지 말고 욕심을 내지 말고 마음을 비워라는 등의 가르침은 내 행동이 낳는 결과들에 대한 의미를 자기 자신과 인연 짓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 존재 전체가 인연 된 요소들에 의해 결박당하는 비참한 결과를 낳게 되고, 그것이 한(恨)이 되어 죽은 후에도 중생으로서의 귀신, 즉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을 가진 못난 귀신이 되고 만다.
그런 상태에서 49재를 지내고 천도재를 지내고 산 사람들이 야단법석을 떨어도 자기 영혼이 이미 이 세계에 묶여버렸기 때문에 저 세상으로 가지도 못한다.
알겠는가?
내 생각, 내 마음, 내 행동 등 '나의 ~~'라는 것은 본래 있지도 않은 망상일 뿐이다.
그래서 수보리가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은 허망한 이름일 뿐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럼 아무 생각 없이 바보처럼 살란 말인가?
아니다.
생각만 굴리지 말고 직접 보는 눈을 가져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때의 소견은 진리가 되는 것이다.
직접 보고 아는 그 눈을 '반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