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대천세계가 이름뿐이라는 것은 중생의 안목으로 보기 때문이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설하신 삼천대천세계는 곧 세계가 아니고 그 이름이 세계입니다.
삼천대천세계를 부수어 먼지로 만든다고 하셨는데, 수보리가 그 삼천대천세계도 이름이 그럴 뿐이라고 하니 하물며 먼지가 어디에 있겠는가?
부처님께서 처음부터 없는 것을 가지고 질문하시니 수보리도 그에 화답한다.
그럼 삼천대천세계와 먼지들이 진실로 실상(實相)이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엄연히 있다.
그럼 무엇이 없다는 것이고 이름만 그렇다는 것인가?
그것은 삼천대천세계와 먼지들에 대한 우리의 상상(相像) 내지 망상(妄想)이 본래부터 없다는 것을 일컬음이다.
삼천대천세계와 먼지들에 대한 정견(正見)을 가지려면 이것들과 자기 자신이 하나가 되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렇지만 중생은 아직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나름대로 생각했는데, 일체의 모든 생각이 실상(實相)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 안목들을 아직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 왜 그 안목들을 가지지 못하는가?
그것은 삼천대천세계와 먼지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생각이 올바른 안목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즉, 자기의 생각이 곧 색안경인 셈이다. 과학에서 말하는 관찰대상과 관찰자를 나누어놓고 관찰자의 입장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관찰자가 관찰대상과 측정방법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면 우리가 과학이라고 부르는 내용들도 100% 순수하게 객관이라고 단정 짓지 못할 것이다.
삼천대천세계와 먼지들을 같은 것으로 보거나 다른 것으로 보는 생각 모두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 색안경을 벗으면 비로소 삼천대천세계가 곧 삼천대천세계임을 알게 되고, 먼지들이 곧 먼지들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 중생들은 대상들을 이름 붙여 알고 있다고 착각한다.
수보리가 삼천대천세계가 이름뿐이라는 것은 바로 중생의 안목으로 보지 말라는 것이다. 보려도 해도 보이지 않고 볼수록 왜곡된다.
먼저 중생의 안목을 벗어야 되는 것이다. 그 색안경을 벗어던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