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히 알기 전에는 말을 하지 않는 겸손한 수행자가 되어야 한다.
수보리야, 여래는 참다운 말을 하는 자며 실다운 말을 하는 자며 사실과 같이 말하는 자며 거짓이 아닌 말을 하는 자며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자이니라
여래가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곧 여래가 이렇게 되어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그래서 여래가 하는 말은 모두 이런 말뿐이 된다. 말할 때마다 모두 진리이니 얼마나 멋있는 존재인가? 언어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얻은 것이다.
여래는 자기 자신과 남을 속고 속이지 않는다는 것인데, 중생인 우리 모두는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고, 알고도 속이고, 모르고도 속이며 존재한다.
악한 사람은 말할 것도 없지만 착한 사람도 알고는 속고 속이지 않지만 모르고 속고 속이는 경우가 많다. 이른바 무지(無知)하면서도 오만(傲慢)한 죄를 자기 자신도 모르게 자타(自他)에게 범하는 것이다.
그래서 완전히 알기 전에는 입을 다물라는 뜻인데, 요즘 그런 겸손한 수행자는 극히 찾아보기 어렵다.
지식으로 조금 알고 그럴듯한 말주변만 있으면 그저 모두 큰스님이 되고 도인이 되어 돈을 갖다 바칠 눈 어두운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끌어모으는 세상이다. 그래서 세상이 시끄럽다.
이 말씀은 한마디로 제발 좀 '믿어라'는 뜻이다.
그럼 여래를 믿을 것인가?
여래의 설법을 믿을 것인가?
여래의 설법을 듣는 나 자신을 믿을 것인가?
나 자신을 믿는다면 나의 어떤 인식을 믿을 수 있는 것인가?
본래 예수님이나 석가모니불은 당사자들이 직접 기독교나 불교 같은 현대의 종교형식을 만든 것이 아니다.
그 당시는 정말 조직화된 집단이 아니라 단순한 군중 또는 무리였던 형태이다. 오로지 한 성인(聖人)을 중심으로 한 일체평등의 순수한 자발적 집단이었던 것이다.
다만 그 가르침이 너무나 위대하여 후대에 추종하는 무리들이 지속적으로 생겨났고 가르침이나 성인을 모시는 형태가 체계적으로 형식화되어 지금의 종교형태로 정착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거기에 따른 수많은 장·단점이 생겨났는데, 가장 치명적인 단점은 신성(神性)이 점차 약해지거나 아예 사라지고 인간 위주의 조직이 되어버렸다는데 그 심각성이 있다.
요즘은 부처님께 올리는 절도 자기 건강을 위한 운동으로 많이 의미부여를 해서 경건함이나 부처님에 대한 존중, 그리고 자기 마음과 영혼의 안정이라는 그 본래 정신이 사라졌고, 부처님을 앞에 놓고 가장 이기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절을 수천 번 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다. 자식이 부모에게 절하는데 자식이 자기 건강을 생각하며 부모에게 절하는 것과 같다. 부처님들께서 벌을 내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겨질 정도이다. 이렇게 종교가 인간위주로 타락해서 종교라고 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불행히도 지금은 우리가 희망하는 그런 종교가 없고, 단지 종교를 사칭한 인간 집단이 번성하는 말세 중에 최악의 말세인 상황인데, 소돔과 고모라에도 의인(義人)이 있음이라. 그 의인은 금강경을 잘 믿고 수지(受持)하고 타인을 위해 설하는 자가 된다.
일단 지금의 타락한 종교를 종교라고 일단 인정해 준다면 모든 종교는 믿음을 그 근본으로 삼는다. 믿음이 없으면 종교는 성립될 수 없다. 그래서 종교는 신앙(信仰)이기도 하다.
그런데 같은 믿음이라도 그 내용이나 차원이 완전히 다르다.
기독교의 믿음은 자기 자신이 빠져 있고 신(神)만 있기 때문에 맹신이나 광신으로 쉽게 빠지게 된다. 고대 원시인들은 자연적인 또한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한 공포심에 기초한 믿음을 가졌는데 여기서 더 나아지지 않았다. 그래서 신앙에 몰입할수록 더욱더 자기는 신에게 바라는 것만 남는 알맹이 없는 자신이 되니 영성이나 의식 수준이 나아지지 않는다. 지식수준이나 물질 수준과는 전혀 별개이다.
인간은 오랜 경험을 통해 무엇이 옳고 그른지 결국 깨닫게 되어 있다. 하물며 동물들도 의식이 점차 진화해 간다. 서양인들도 이제 기성종교를 포기하고 점차 불자(佛者)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신을 믿든 안 믿든 결국은 상(相)을 갖고 있는 나 자신의 실존에 대해 궁금하고 나 자신이 문제이니 당연하다.
반면 불교의 믿음은 부처님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자기 자신의 근본에 대한 믿음을 동시에 요구하고 그것을 올바르고 진정한 믿음으로 삼는다. 그리고 동시에 이 경(經)에서와 같이 선(禪)이라는 것을 통해 자기 존재의 본질을 스스로 확인해 보라는 수많은 가르침을 같이 준다. 그래서 불교는 맹신이나 광신에 빠지지 않게 되어 있다. 그리고 스스로 체득해 가는 동안에 내면 깊이 자발적이고도 순수한 믿음이 저절로 나오게 된다. 이렇게 자기 자신의 높은 가치를 스스로 추구해가다 보니 영성이 높아지고 인식의 차원도 달라지고 넓어지고 깊어져가는 것이다. 그래서 세월이 가면 이 세계의 모든 이들이 결국에는 저절로 불자(佛者)가 되게 되어 있다.
무엇을 이렇게 믿을 것인가?
그 기준이 바로 불법승(佛法僧)이라는 중생계에서의 삼보(三寶)이다.
불(佛)은 여래이고 법(法)은 그 가르침이고 승(僧)은 나 자신의 본래면목이다.
이 세 가지를 동시에, 그리고 평등하게 마음속에 품는 것이 바로 올바른 믿음이다. 어느 하나라도 결여된 믿음은 부처님과 자기 자신에게서 등을 돌리는 것이다.
이 금강경은 철저하게 자기 자신의 본래면목에 대해서 밝혀놓은 석가모니불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이 경을 통해서 삼보(三寶) 가운데 어느 하나가 평소 조금 부족했다면 그 부분에 대한 믿음을 채우는 것이 이 경을 올바르게 수지독송하는 것이고 그 공덕은 무량무변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