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경영하는 금강경season3(19.이상적멸분13)

색에 머무르지 않는 무주상보시를 하는 것이 보시바라밀을 완성하는 것이다.

by 하이붓다 지공선사

시고 불설 보살 심불응주색보시 수보리 보살 위이익일체중생 응여시보시

(是故 佛說 菩薩 心不應住色布施 須菩提 菩薩 爲利益一切衆生 應如是布施)


그러므로 부처님이 말하기를, 보살은 마땅히 마음을 색에 머물지 말고 보시하라고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일체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위해서 응당 이와 같이 보시하느니라


우주의 진리를 설했다는 이 금강경에서 석가모니불께서 보시(布施)에 관해 여러 가지 계속 언급하신다.


참선(參禪) 위주로 수행하는 수행자들이 보시를 기껏해야 유위복(有爲福, 다함이 있는 복)을 별 것 아니라고 치부할지 모르겠지만 이 보시라는 것이 생각만큼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보시는 성불도(成佛道)를 가는 데 있어서 수많은 마장을 극복하고 올바른 선지식을 만나고 수행의 위기 순간순간마다 물러나지 않고 전진할 수 있는 복력(福力)의 위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수행의 길을 가는 데 있어서 엔진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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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성불(成佛)하고 난 후 중생구제에 있어서 중생들의 중생심을 잘 극복하게 해 주고 자기의 가르침이 사람들에게 잘 받아들여지지는 보이지 않는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이른바 중생구제에 있어서 중요한 하나의 방편력(方便力)을 가진다고나 할까.


그리고 생활에서나 수행에서나 부처님의 가피를 받는 데 있어서 자기가 보시로 지어놓은 복이 그릇 역할을 하는 경우가 흔하다. 보시를 많이 한 사람이나 그런 조상이나 부모를 두면 다음 생에 큰 재물복이나 기타 여러 가지 복을 가진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다.


보살이 비록 일체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위해서 색(色)에 머무르지 않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하더라도 그 보시를 얼마만큼 받는가 하는 것은 자기가 보시로 이미 지어놓은 복(福)에 상당 부분 달려있다.


이른바 법성게에서 말했듯이 중생수기득이익(衆生隨器得利益)인 것이다. 여기서 그릇인 기(器)는 자기가 얼마나 보시를 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그릇인 것이다.


그러니 석가모니불께서 어찌 보시에 관해 도(道)를 닦는 것과 관계없는 행(行)이라고 무시할 수 있겠는가?


옛날 선사들이 보시로 복을 쌓는 것을 가지고 도를 닦는 것과는 큰 상관없다고 한 이유는 복을 쌓고 누리고 하느라고 세월을 보내지 말라는 뜻이고, 또 보시라는 선(善)을 행하는 것이 복을 쌓을지언정 곧 도(道)를 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렇다고 보시를 무시했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선사들은 보시의 위력을 잘 알고 있다. 인과법(因果法)을 모두 보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 당시 사람들이 복을 많이 지으면 그것이 곧 성불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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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이 적은 사람은 산에서 수행하더라도 병에 잘 걸리거나 호랑이나 도덕을 만나 해(害)를 당하거나 해서 도(道)를 가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


보시로 인해 쌓이는 것은 비록 유위복(有爲福)이지만 이것이 있는 동안 도(道)를 닦는다면 도를 잘 닦을 수 있는 제반 여건을 잘 마련해 준다. 그러니 어찌 보시(菩施)를 감히 무시하겠는가?


보시란 이런 것인데, 보살은 일체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위해서 색에 머무르지 않는 보시를 한다고 한다. 이른바 앞에서 언급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인 것이다.


색(色)에 머무르는 보시도 위와 같은 공덕을 지닐진대, 색에 머무르지 않는 보시를 하면 얼마나 큰 공덕을 가져오겠는가?


색에 머무르는 보시는 보시를 받는 상대방과 관련된 인연법과 인과법의 작용 속에서 주로 이루어진다. 즉, 은혜를 주면 그 상대방이 직접 은혜를 갚는 대응이 되는 방식인 것이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과 대상과 상황에 한정되는 복(福)을 주로 가져온다.


반면 색에 머무르지 않는 보시는 시방법계(十方法界)에 회향(回向)되므로 색상(色相)을 벗어나서 작용을 하게 된다. 즉, 시간과 공간과 대상과 상황에 구속되지 않고 활용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은혜를 주면 그 상대방과 관계없이 내가 위기에 처했을 때 전혀 이전의 인연이 없는 사람이 나타나서 나에게 벗어날 탈출구를 마련해 주는 식인 것이다.


이렇게 색(色)에 머무르지 않는 보시는 색(色)을 떠나서 자유자재로 모두에게 필요한 만큼 주어지는 공덕을 가지고 있다.


이른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한 만큼 주어지는 이데올로기 사상인 공산주의와 유사하다고 보면 된다.


능력에 따라 많이 일한 사람은 자기가 차지하는 권리가 있는 것만큼의 소득량(所得量)을 다른 사람이 누리므로 보이지 않게 사회 전체나 부족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보시의 공덕을 짓게 된다. 반면 능력이 적어 일을 적게 해서 조금 받아 곤궁할 사람이 그것을 벗어나 필요한 만큼 주어지는데, 개인적인 부채(負債), 즉 빚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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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은 마땅히 만중생의 모든 이익을 위하고 인과법에 따라 이익을 받는 중생들이 빚으로 여기고 부담을 느끼고 다시 갚아야 되는 상황을 원하지 않는 것이니 당연히 이렇게 색(色)에 머무르지 않는 보시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보살이 아니다.


공산주의를 완성시키려면 우리 모두가 보살(菩薩)이 되어야만 가능한 것인데, 마르크스-엥겔스는 그만 이것을 간과한 것이다. 진작 불교공부를 했더라면 이런 예상치 못한 과오로 인해 이 지구상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것을 피할 수 있었고 더 원숙한 사상을 내어 놓을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다.


마르크스-엥겔스도 다음 생애는 부디 보살이 되기를 바란다. 마음은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깊이 생각해 줄 수 있는 반쪽 보살은 아닌가? 지혜가 모라라서 생긴 문제일 뿐이지.


보살(菩薩)은 이렇게 무주상보시라는 자비(慈悲)를 행한다. 그래서 대자대비인 것이다.


6바라밀 수행 가운데 첫 번째로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을 꼽은 이유는 위와 같은 이유들 때문이다. 색(色)에 머무르지 않는 무주상보시를 할 줄 알게 되는 것이 곧 보시바라밀을 완성하는 것이 된다. 그러면 그대는 진정 보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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