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경영하는 금강경season3(20.이상적멸분14)

모든 것을 상으로만 보고 상으로만 대하지 않는다면 그대도 중생이 아니다.

by 하이붓다 지공선사

여래 설 일체제상 즉시비상 우설 일체중생 즉비중생

(如來 說 一切諸相 卽是非相 又說 一切衆生 卽非衆生)


여래가 설한 일체의 모든 상은 곧 이 상이 아니며 또한 일체 중생이라고 설함도 곧 중생이 아니니라


여래께서 색(色)에 머무르지 않는 보시를 알려주시니 또 그것을 해보겠다고 서두른다.


자기가 아직 상(相)을 가진 중생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상(相)을 가진 중생이 무주상보시를 하는 것은 사실상 어려운 일이 된다. 자칫 무주상보시를 흉내 내면서 아상(我相) 등을 비롯한 상(相)이 더욱 강한 중생이 되기가 너무 쉽다. 흔히 도를 닦는다고 하면서 아상만 가득 키우는 일이 우리 중생의 도 닦는 일이 되는 것이 흔한 경우와 똑같다.

pexels-karolina-grabowska-6957154.jpg

'나는 무주상보시를 한다'는 상(相)을 또 내는 것이 우리 중생이다. 도대체 상을 떠나서 뭘 할 수가 없다. 우리 중생의 슬픈 실상이다.


아무리 좋은 것이나 좋은 일이라도 너무 집착하면 또 다른 문제를 파생시키게 되어 있다. 좋은 것 이전에 집착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남에게 좋은 일을 해주면서 자기 자신은 정작 망가져 간다.


그러니 우선 색(色)에 머무르는 보시만이라도 잘하도록 하자. 그것만 해도 자기 상(相)이 감당할 수 있는 복(福)이 충분히 넘치고 또 넘친다.


그러면서 점차 자기의 상(相)을 떠날 수 있는 보시를 하는 쪽으로 발전시켜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아니, 그렇게 되어가는 것이 순리이기도 하다. 억지로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순리가 곧 도(道)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를 닦는 데 있어서 자연(自然)을 많이 보고 배우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근본을 망각하면 곧 길을 잃는 것이니 좋은 일들이 올바른 결과를 가져오기 어렵게 된다.


그래서 상(相)이 곧 상이 아니고 중생(衆生)이 곧 중생이 아니라고 하시는 것이다.


근본이 그런데, 그것을 알면서도 왜 도대체 상과 중생의 모습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상(相)을 자기 자신으로 동일시하는 착각 내지 망상(妄想)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지금 여름이니 내가 바다 위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해 보자.

pexels-archie-binamira-707185.jpg

바닷속에 오래 머물다 보니 바다를 곧 자기 자신의 일부 내지 전부라는 망상이 생기게 된다.


바다는 곧 자기가 아니니 밖으로 나와서 샤워를 하면 깨끗해지고 바다를 감상하며 즐기면 된다.


그런데 바다를 자기라고 착각하여 오래 머물다 보면 결국은 파도를 만나거나 상어를 만나거나 하여 언젠가는 휩쓸려 쓰러진다. 아니면 힘이 다하여 빠지고 만다.


또 바다 밖으로 나오더라도 몸에 여전히 묻어있는 소금기나 여러 가지 바다 성분을 씻어내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늘 몸에 묻힌 채로 산다. 어디 가나 바다 냄새가 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바다를 자기 자신이 태어나서 성장한 환경이라고 대입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자기 자신이 성장환경을 마음속에 깊이 받아들여 자기 자신의 일부로 만들면 평생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반면 자기 자신이 그 성장환경을 가볍게 생각하면 거기서 오는 좋지 않은 영향을 받지 않게 되고 성장하여 자기 존재가 새로 환경을 구축해 나갈 수 있게 된다. 이른바 주체성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중생(衆生)은 성장환경을 자기의 일부 내지 전부로 받아들이고 산다. 보살(菩薩)은 성장환경과 관계없이 자기 자신을 가꾸어나간다.


인간 세상에서 위인들은 성장환경에서 오는 해독(害毒)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의 타고난 내면을 가꾸는데 주력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싯다르타가 성장할 때 모든 만족한 것들로 둘러싸인 성장환경의 영향을 티끌만큼도 받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왕자가 출가하여 곧바로 거지로 지내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왕자로 즐기다가 사문유관(四門遊觀)으로 인하여 출가했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그냥 후세 사람들을 위하여 만들어진 이야기이다. 궁궐에서도 병자와 노인과 죽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또한 출가인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을 터인데 싯다르타가 모를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싯다르타는 자기의 성장환경과 아무런 관계없이 자기 자신과 더불어 지냈음을 알 수 있다.


자기 자신과 성장환경은 본래 아무런 관계가 없는 그런 것인데, 우리는 도대체 왜 이러나? 천상천하유아독존은 고사하더라도 상을 가진 중생 차원에서조차도 주체성 완전 상실을 하곤 한다.


성장환경은 개개인마다 좋다 나쁘다는 주관적 평가를 하고 있지만 실은 철저히 중립적이다.

pexels-shuvrasankha-paul-2616865.jpg

그것을 나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치게 하는가는 자기가 얼마나 마음으로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다.


태어나서부터 자기의 상(相)을 가지고 주어진 모든 주변환경을 상(相)으로만 받아들이며 자기화(自己化)시켜가는 이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무주상보 시는커녕 올바른 초보적인 수행조차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여래께서는 일체상이 곧 상이 아니고 그대도 실은 중생이 아니라고 자상하게 일러주신다. 모든 것을 상으로만 보고 상으로만 대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바닷속에 아무리 오래 있어도 바다는 바다이고, 나는 나이며, 자기 자신은 바다가 아니고, 바다가 곧 내가 될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바다에서 나오는 것이 곧 보살(菩薩)이고, 바닷속에서 무엇이 필요하다고 고래고래 목청껏 소리치는 것이 중생이다. 소리쳐봐야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 중생들 모두 바닷속에 있기 때문이다.



keyword
이전 19화나를 경영하는 금강경season3(19.이상적멸분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