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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 Jun 09. 2024

첫사랑 물들인 봉숭아

난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고려 땅에 들어와서 정착한 봉숭아야. 빨강, 분홍, 주황, 보라, 하양 꽃이 날개를 펼친 봉황 닮았다고 해서 봉선화라고도 불러. 사람들은 우리 꽃, 푸른 잎을 괭이밥 잎과 섞어 아이 손톱을 다홍색으로 물들였어. 그러면 아이에게 들어 오려는 나쁜 기운을 막아서 건강하게 자랄 것이라고 믿었대. 게다가 뱀과 벌레는 우리 줄기에서 나는 남다른 냄새를 싫어해서 울타리 밑이나 장독대 옆 그리고 밭 주변에서 사람들을 가까이 지켰다지.

겨울나기가 힘든 난, 추위가 너무 싫어서 늦은 봄이 돼야 싹을 틔우는 늘보야. 그래도 서리 내리기 전에 씨앗을 만들어야 해서 마음이 급했어. 여름은 짧기만 한데 여러 곤충을 불러들이려면 꽃도 많이 피우고 꽃물도 채워 넣어야 했거든. 그래서 사방으로 돌려가듯 잎을 펼쳐 힘을 모았고 겨우 꽃을 피웠어. 무언가 해냈다는 생각에 안도하고 뿌듯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뒤영벌이 가느다랗고 긴 꿀샘에 구멍을 내서 꽃물을 도둑질하지 뭐야. 황당하기도 하고 여태껏 바지런하게 했던 노력이 물거품 된 것 같아 허탈해졌어.

곁에 물봉선이 측은한 눈빛을 내게 보냈어. 그도 나처럼 물을 좋아하고 추위를 싫어하는 느림보인데 우리보다 먼저 이 땅에 자리를 잡은 친척이래. 그는 자기 이야길 했어. "내 엄마도 숲속 계곡에서 가을꽃을 피웠어. 그런데 꼬리박각시가 긴 주둥이로 꿀만 빨아가서 당황했는데, 연이어 뒤영벌이 나타나서 꿀주머니까지 털어갔어. 그래도 엄마는 화내지 않았어. 계속 꽃을 피우면 다른 벌과 나비가 꾸준히 찾아온다고 믿었대. 그렇게 좌절하지 않고 꽃을 피워서 내가 태어났어. 엄마는 날 희망이라고 불렀지." 그 말에 용기를 얻어 난 꽃을 계속 피웠고 다행히 통통한 씨앗 주머니가 맺혀서 점점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어. 이젠 나도 씨앗을 멀리 보낼 수 있게 되었는데, 문득 씨앗이 멀리 간다고 내가 가는 것도 아닌데,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물봉선

그래서 내게 힘이 되었던 물봉선에게 물었지. "넌 어떻게 숲을 떠나 이곳에 오게 된 거니?" 그러자 물봉선이 "처음에 형제들과 콩깍지 씨앗 주머니에 있었는데, 점점 부풀다가 팡 하고 튕겨져 개울에 빠졌지 뭐야? 정신 차려보니 함께 있던 형제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아서 얼마나 당황했는지 몰라. 뿌리를 내릴 곳을 찾기는커녕 거센 여울에 시달리다가 겨우 여기까지 왔지." 그 말을 듣고 "혼자 외롭고 힘들지 않았어?" 하고 물었어. 물봉선은 "이렇게 버틸 수 있었던 건 엄마가 보여준 행동 때문이야. 꿀을 훔쳐 간 뒤웅벌과 꼬리박각시에도 당당했고 우리에겐 한없이 부드러우면서 우리를 밀어내려던 다른 식물들과는 다투지 않으셨거든. 그래서 나도 힘든 일은 엄마를 생각하면서 참고 이곳에서 다른 식물들과 다투지 않고 있지. 너와도 친구가 되었잖니?" 그 이야길 듣고 내 아이들도 저 물봉선처럼 힘든 여행을 떠날 텐데, 그 아이들에게 힘이 되는 이야길 해주고 싶었어.

그때 어린 소녀가 곁에 와서 내 여문 꽃송이와 잎을 따면서 수줍게 혼잣말을 했어. "손톱에 봉숭아 물을 예쁘게 들여야지. 첫눈 올 때 봉숭아 물이 남아있으면 오빠도 날 좋아하게 될 거야!" 내 다홍색 물감은 손톱 깊이 스며들어 잘 지워지지 않겠지만, 손톱이 자라면 물감은 점점 사라질 텐데. 저 소녀의 바람이 이뤄질까 궁금해졌어. 그녀 소망대로 되면 얼마나 좋을까? 물봉선에게 말했지. "바라는 것이 생겼어! 내 아이들이 어떤 고난에도 굴복하지 않고 꽃을 피운다면 자랑스러울거 같아. 그리고 순수한 소녀들의 사랑을 응원하는 물결이 이 들판에 가득 차면 좋겠어." 물봉선이 엄지를 치켜세웠어. 그래 내 씨앗에는 사람들이 희망을 품고 그것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마음이 담겨있지.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 그대들의 첫사랑이 어디로 튈지 몰라요.


봉숭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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