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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 Jun 03. 2024

노루귀의 인내

'노루귀! 힘을 모아야 해!'

알고 있었어. 오래전부터 저 잔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야. 그래도 못 들은 척 할 수 없었지. 지난해 저 소리를 무시하고 얼렁뚱땅 넘겨지내다가 싹쓸바람에 혼쭐났지. 한여름 따뜻한 햇볕이 그렇게 야속하게 사라질 줄 몰랐어. 갑자기 찾아온 추위에 당황하고 연약한 덩이줄기로 겨울은 겨우 견뎠지만, 이른 봄 자국눈에 꽃대도 올리지 못했어.  이렇게 살면 안되겠다 깨달았어. 늦었지만, 사방으로 잔뿌리들을 뻗었고 물을 빨아들였지. 그래서 노루 귀를 닮은 잎을 작년보다 훨씬 크게 펼칠 수 있었고 햇볕에서 힘을 얻어 땅속 덩이줄기에 영양소를 저장했어. 그 힘을 아무렇게 써버리거나 충분하게 모아두지 못하면 혹독한 겨울을 견뎌내지 못할 거야.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추위를 몰고 내려오자 내 잎은 추위를 견디지 못해 말라 떨어졌고 뿌리와 덩이줄기만 담았어. 커다란 상수리나무도 큰 잎을 떨구기 시작했어.  난 낙엽에 덮여 어둠에 갖혀 버렸지. '아 이게 뭐야? 지난 겨울엔 볕은 있었는데, 이젠 아주 작은 햇빛마저 볼 수 없으니 정말 답답해. 이 어둠 속에서 어떻게 견디지? 왜 이런 시련을 주는 것일까? 세상을 향해 욕이라도 하고 싶어.' 화를 낸다고 풀어지는 것도 아니고 들어주는 친구도 없으니 제풀에 지쳐버렸어. 그러다가 마음을 다시 먹었지 '그래, 따뜻한 봄만 바라보고 기다리던 지난 겨울과 달리 뭔가 보람된 일을 해야겠어!' 고민 끝에 친구를 만들겠다고 결심했어. 내 곁에 누군가 있다면 겨울에도 든든하고 덜 외로울 거야! 그러려면 꽃을 피워야 하는데 내 주변에는 큰 나무가 너무 많아. 그들이 내 머리 위를 덮어 해를 가리면 지금처럼 아무 것도 할 수 없을텐데 방법이 없을까? 그때 지난해 눈 위를 뚫고 햇볕에 반짝이는 노란 꽃잎, 복수초 무리가 떠올랐어. 그들은 눈이 채 녹지 않은 이른 봄부터 꽃을 피우고 벌레를 끌어모았는데, 씨앗 맺는 것을 보고 질투나고 부러웠지.

나도 남들보다 빨리 꽃을 피워야겠다 마음먹고 벌레들을 유혹할 크고 화려한 꽃을 떠올렸지만, 이내 머리를 흔들었지. 향기로운 꽃과 꿀을 만드는 것은 내겐 벅찬 일이야. 가진 것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어. 힘을 모아두었던 덩이줄기에서 소소리바람을 견딜 수 있게 하얀 솜털 옷을 입은 따뜻한 꽃대와 연약한 꽃잎 대신 두텁고 화려한 꽃받침을 만들었지. 이 꽃대와 꽃받침이 추위를 견디고 꽃술을 지켜줄거야. 그리고 작은 곤충을 유혹하고 바람이 꽃가루 받이가 되어 내 씨앗을 맺게 해줄꺼야.

해가 바뀌고 볕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하자 다시 내 안의 목소리가 들려왔어. '노루귀! 지금 꽃을 피워야 해 !' 두근두근 심장이 뛰는 소리를 느끼며 머리 위로  쌓인 낙엽을 피하고 아직 녹지 않은 눈을 뚫고 숨통을 열었어. "아! 신선한 공기 얼마만이니?" 즐거운 비명을 질렀지. 그리고 꽃받침을 가다듬고 주위를 돌아보니 나처럼 얼어붙은 땅을 뚫고 나온 복수초, 변산바람꽃이 보인다. 그들도 나처럼 긴 겨울을 견딘거라고 생각하니 질투보다는 얼마나 반가운지 몰라. 그리고 불어오는 바람을 향해 꽃받침을 활짝 펼쳤어. 여름이 되기 전에 씨앗을 맺을 수 있을거야.

내게 가장 달콤함 순간은 겨울을 기다리고 꽃대를 올린 바로 지금이야. 문득, 내안의 소리가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 소리가 남들보다 빨리 겨울 속 봄 세상을 만들도록 나를 도와주었지. 이제 친구들이 내 주변에 뿌리를 내리면, 그 소리를 들어보라고 전해줘야겠어. 그들도 나처럼 힘을 모아 참고 견디면 달콤한 순간을 함께 맞이할 거야. 내안의 소리는 바로 우리의 꽃말 '인내'라고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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