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여름이 싫어! 하필 이렇게 더운 곳에서 살아야 하는 거지? 이런 강렬한 햇빛과 후덥지근한 더위는 나와 맞지 않아! 그래도 나에게 희망이 있지. 그건 밤이야! 밤은 유일한 내 기쁜 마당이야. 밤 노래 불러볼까? "너를 혀끝에 대면 지그시 떠오르는 맛(味)/ 어깨를 훌쩍이며 네 속에 흘려버린 눈물(淚)/ 어둠 속 너를 딛고 생명이 꿈틀대던 꿈(夢)/ 애타게 벗고프다 아련히 떠나보낸 그리움(思)/ 서서히 녹아들며 너에게 유혹되는 밤(夜)" 내가 누구냐고? 이 가수로 말할 것 같으면 난 하얀 박꽃이야! 그런데 내가 흥겹게 노래 부르던 이곳에 나타나서 달빛 아래 우아하게 춤추며 밤을 누리는 이가 하나 있어. 누군가 보니 박각시야! 난 그녀를 각시로 대한 적도 없는데, 박각시라니. 순정파 달맞이꽃이 아는 척하더라고. 자긴 달을 좋아하니까 나보고 박각시와 잘해보라고 말이야!.
"안녕 박각시? 넌 낮에 춤추는 걸 봤는데 밤에도 지치지도 않는구나!" 그 말에 박각시가 벌컥 화를 내며 말했어. "남의 일에 관심을 꺼주지 그래? 내가 낮에 잠을 자던 춤을 추든 무슨 상관이래?" 하며 말했어. 내가 뭔 말을 했다고 저리 날카롭게 대꾸하는지 당황했지. 저 치가 내게 뭐라고 각시라고 부르는 거지? 내가 한해살이풀이라도 알건 안다고. 잘난 척 몸에 꽃가루가 묻지 않게 긴 대롱으로 꿀만 빨아가면서 씨앗이나 제대로 맺게 해 주는지도 모를 그녀가 내 각시라니. 게다가 그녀는 내게만 오는 게 아니라 낮에도 이 꽃, 저 꽃 친한 척 달려드는 모습은 정말 못 봐주겠더라고! 그때 불만 가득한 내 얼굴을 보더니 그녀가 톡 쏘아붙였어. "넌 말이야 나한테만 꿀을 주는 것도 아니고 이 나방, 저 나방 달려드는 애들에게 전부 꿀을 주면서 자기가 내 신랑인 양 간섭이냐? 네가 기다림의 꽃이라고? 웃겨 정말! 지나가던 박쥐가 웃겠어" 그녀가 제일 싫어하는 박쥐가 웃는다고? 그 말에 난 정말 화가 났어.
이 일은 우리 모두 마음의 상처로 남았고 시간이 흘러 예쁜 박들이 열렸지. 사실 그녀 덕분이라는 걸 알아. 날 찾아온 것은 그녀밖에 없었으니까. 그래도 괜스레 미안해지는 거 있지? 언제 다시 보면 사과해야겠다 생각했어. 내 아이들은 점점 커져갔고 가을 둥근달은 마음을 더 울적하게 만들었어. 그때 그녀가 내 앞에 나타난 거야. 그녀가 먼저 말을 걸었어. "말을 내가 심하게 했지? 사과할게" 그 말에 뒤질세라 말이 튀어나왔어 "나야말로 미안했어. 내가 다른 꽃을 질투해서 비아냥거렸어. 사과할게" 그러자 다행이라는 듯 돌아서는 그녀에게 말했어. "네 아이들을 낳을 때가 된 거 같은데, 내가 보살펴주면 안 될까?" 그 말에 그녀는 어색하지만 반가운 눈빛으로 말했어 "그래도 될까?" 난 말했어. "물론이지 너도 내 아이들을 맺게 해 주었는데, 당연히 나도 네 아이들을 지켜줘야지!" 그녀는 내 잎사귀 뒤에 그녀의 소중한 알들을 붙여두며 말했어. "우린 오해가 있었지만, 아이들에겐 네가 잘 이야기해 줘. 무슨 말을 해주면 될지 넌 알 거야!" 그녀는 아이들 곁에 오래 있을 수가 없어. 그녀를 보면 알을 노리는 천적이 달려들 수 있거든. 난, 잎을 감싸서 아무도 보지 못하게 그녀 아이들을 숨겼지. 날 보던 그녀 눈빛이 촉촉이 젖어 오는 것을 느꼈어. 나도 괜스레 마음이 먹먹해지더라. 그래. 우리 모두 올 겨울이 마지막인 것을 알아.
그녀는 내 각시가 맞았어. 그녀의 아이들을 돌보고 있거든. 그 아이들이 내 잎을 갉아먹고 애벌레에서 고치가 되려고 준비 중이야 그 아이들에게 말했지. "박꽃에게 부드럽게 대화해 주렴. 여름날 밤이 긴듯해도 마음의 상처를 품고 보내기엔 너무 안타깝고 짧은 시간이란다." 이제 난 원이 없어. 마음속에 기다리던 그녀와 화해했고 기다림을 이어갈 아이들이 있으니까. 난, 노파심에 가훈인 양 말했어. "박각시에게 성질내지 마라! 너희 각시란다"
* 박각시는 낮에도 활동하며 박꽃 이외에도 많은 꽃의 수분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