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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 Jul 10. 2024

박대박, 박꽃과 박각시

뜨거운 여름이 싫어! 하필 이렇게 더운 곳에서 살아야 하는 거지?  이런 강렬한 햇빛과 후덥지근한 더위는 나와 맞지 않아! 그래도 나에게 희망이 있지. 그건 밤이야! 밤은 유일한 내 기쁜 마당이야. 밤 노래 불러볼까? "너를 혀끝에 대면 지그시 떠오르는 맛(味)/  어깨를 훌쩍이며 네 속에 흘려버린 눈물(淚)/  어둠 속 너를 딛고 생명이 꿈틀대던 꿈(夢)/  애타게 벗고프다 아련히 떠나보낸 그리움(思)/ 서서히 녹아들며 너에게 유혹되는 밤(夜)" 내가 누구냐고? 이 가수로 말할 것 같으면 난 하얀 박꽃이야! 그런데 내가 흥겹게 노래 부르던 이곳에 나타나서 달빛 아래 우아하게 춤추며 밤을 누리는 이가 하나 있어. 누군가 보니 박각시야! 난 그녀를 각시로 대한 적도 없는데, 박각시라니. 순정파 달맞이꽃이 아는 척하더라고. 자긴 달을 좋아하니까 나보고 박각시와 잘해보라고 말이야!. 

박꽃, 야행성이라 낮에는 꽃을 보긴 어렵다

"안녕 박각시? 넌 낮에 춤추는 걸 봤는데 밤에도 지치지도 않는구나!" 그 말에 박각시가 벌컥 화를 내며 말했어. "남의 일에 관심을 꺼주지 그래? 내가 낮에 잠을 자던 춤을 추든 무슨 상관이래?" 하며 말했어. 내가 뭔 말을 했다고 저리 날카롭게 대꾸하는지 당황했지. 저 치가 내게 뭐라고 각시라고 부르는 거지? 내가 한해살이풀이라도 알건 안다고. 잘난 척 몸에 꽃가루가 묻지 않게 긴 대롱으로 꿀만 빨아가면서 씨앗이나 제대로 맺게 해 주는지도 모를 그녀가 내 각시라니. 게다가 그녀는 내게만 오는 게 아니라 낮에도 이 꽃, 저 꽃 친한 척 달려드는 모습은 정말 못 봐주겠더라고! 그때 불만 가득한 내 얼굴을 보더니 그녀가 톡 쏘아붙였어. "넌 말이야 나한테만 꿀을 주는 것도 아니고 이 나방, 저 나방 달려드는 애들에게 전부 꿀을 주면서 자기가 내 신랑인 양 간섭이냐? 네가 기다림의 꽃이라고? 웃겨 정말! 지나가던 박쥐가 웃겠어" 그녀가 제일 싫어하는 박쥐가 웃는다고? 그 말에 난 정말 화가 났어.

하얀 박꽃, 밤에도 수줍게 보인다.

이 일은 우리 모두 마음의 상처로 남았고 시간이 흘러 예쁜 박들이 열렸지. 사실 그녀 덕분이라는 걸 알아. 날 찾아온 것은 그녀밖에 없었으니까. 그래도 괜스레 미안해지는 거 있지? 언제 다시 보면 사과해야겠다 생각했어. 내 아이들은 점점 커져갔고 가을 둥근달은 마음을 더 울적하게 만들었어. 그때 그녀가 내 앞에 나타난 거야. 그녀가 먼저 말을 걸었어. "말을 내가 심하게 했지? 사과할게" 그 말에 뒤질세라 말이 튀어나왔어 "나야말로 미안했어. 내가 다른 꽃을 질투해서 비아냥거렸어. 사과할게" 그러자 다행이라는 듯 돌아서는 그녀에게 말했어. "네 아이들을 낳을 때가 된 거 같은데, 내가 보살펴주면 안 될까?" 그 말에 그녀는 어색하지만 반가운 눈빛으로 말했어 "그래도 될까?" 난 말했어. "물론이지 너도 내 아이들을 맺게 해 주었는데, 당연히 나도 네 아이들을 지켜줘야지!" 그녀는 내 잎사귀 뒤에 그녀의 소중한 알들을 붙여두며 말했어. "우린 오해가 있었지만, 아이들에겐 네가 잘 이야기해 줘. 무슨 말을 해주면 될지 넌 알 거야!" 그녀는 아이들 곁에 오래 있을 수가 없어. 그녀를 보면 알을 노리는 천적이 달려들 수 있거든. 난, 잎을 감싸서 아무도 보지 못하게 그녀 아이들을 숨겼지. 날 보던 그녀 눈빛이 촉촉이 젖어 오는 것을 느꼈어. 나도 괜스레 마음이 먹먹해지더라. 그래. 우리 모두 올 겨울이 마지막인 것을 알아.

박각시. 벌새를 닮았지만, 나방이다

그녀는 내 각시가 맞았어. 그녀의 아이들을 돌보고 있거든. 그 아이들이 내 잎을 갉아먹고 애벌레에서 고치가 되려고 준비 중이야 그 아이들에게 말했지. "박꽃에게 부드럽게 대화해 주렴. 여름날 밤이 긴듯해도 마음의 상처를 품고 보내기엔 너무 안타깝고 짧은 시간이란다."  이제 난 원이 없어. 마음속에 기다리던 그녀와 화해했고 기다림을 이어갈 아이들이 있으니까. 난, 노파심에 가훈인 양 말했어. "박각시에게 성질내지 마라! 너희 각시란다"

호리병박 열매

* 박각시는 낮에도 활동하며 박꽃 이외에도 많은 꽃의 수분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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