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국제학교에서 길을 잃다
아미티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장단점이 분명해졌다. 장점으로는 딸들을 등하교 시키느라 길에서 버리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는 점이었다. 보통은 아침에 학교로 가는데 30분정도의 시간이 걸리고 또 돌아오는데 30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학교 앞 주차장에서 딸들 친구의 엄마= 내 친구들을 만나서 수다를 떨다보면 해가 뜨겁게 머리 위를 달구고 우리는 더 견디지 못하고 각자의 집으로 가곤 했다. 집에 와서는 보통 집안일을 간단하게 하고 아파트 안에 있는 해변으로 나가 온통 해를 받으며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었다. 여유가 넘쳤다. 그리고 딸들을 데리러 갈 시간이 다가오면 집으로 돌아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따뜻한 나라였기에 옷차림은 늘 가벼웠고 그것 때문인지 마음도 늘 여행 온 사람처럼 밝았다. 시간이 더 주어질 때는 집 2층에서 바로 연결되는 야외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배가 출출해질때 즈음에는 점심으로 아파트 단지내에 있는 대형 슈퍼마켓 웨이트로즈에 가서 적당한 점심을 사와서 먹었다.
웨이트로즈에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이 가득했다. 처음 아부다비를 와서 가장 나를 기쁘게 한 것은 치즈였는데, 나는 체다치즈에서 에멘탈치즈, 브리치즈, 그뤼에르까지 치즈러버기때문이다. 와인에 치즈에 재즈면 세상에서 부러울 것이 없이 느끼는 사람이라 아부다비의 슈퍼마켓은 천국으로 들어가는 출입문같은 느낌이었다. 웨이트로즈는 영국 슈퍼마켓 체인으로 일반 슈퍼마켓보다 음식 값은 좀 비싸지만 확실히 그곳에서 조리되는 To-go 음식은 가격대비 어디에도 본적없는 퀄러티와 맛이었다. 그렇게 도시락을 하나 만들어오고 라떼까지 곁들여 집에서 점심을 먹고는 아이들을 데리러 나갔다. 아미티에 출근하며 일과가 바뀌었다. 자녀들의 등교와 함께 출근하며, 집에서 갖던 달콤한 휴식은 학교 수업 사이사이의 공강이나 쉬는 시간에 찾아가는 카페에 가는 시간으로 대체되었다. 잠시의 여유를 만끽하려 학교 카페에는 늘 교사들이 줄을 서 있었다. 출근과 동시에 수업이 시작되는 날에는 Teacher’s room이라고 불렀던 교직원 휴게실에 집에서 가져온 도시락과 가방을 두고 곧장 교실로 향했다. 초등 수업에서는 주로 영어시간에 학생들 옆에 앉아 그들을 도왔다. 국제학교지만 한국 학생의 비율이 꽤 높았다. 학교는 71개국 출신 국가의 학생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내가 아미티에서 직접 만난 학생들은 영국 학생의 비율이 가장 높았고, 그 다음은 프랑스,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등의 유럽 국가와 핀란드, 덴마크 등의 북유럽 국가, 요르단, 이집트 등의 주변 아랍 국가, 아프리카의 모로코, 알제리 등의 나라들 그리고 북미의 캐나다, 미국, 남미의 멕시코, 베네수엘라, 동북아시아의 한국, 부탄 동남아시아의 말레이시아, 필리핀, 오세아니아의 호주 등이었다. 그 중 초등에서 나의 담당은 이제 막 아부다비에 도착해 영어가 서툰 한국 학생들의 수업 보조와 아랍어 수업에서 아랍어를 따라가기 힘들어하는 각국 학생들의 보조였다. 나의 보조형태는 두 가지였다. 교실 내 보조와 교실 밖 보조였는데, 교실 내 보조는 주로 영어수업시간에 이루어졌는데 교사의 학습목표를 듣고 학생에게 그것을 설명해주고 옆에서 도와가며 활동을 하는 식이었다. 교실 밖 보조형태는 교사가 해당 학생의 수준에 맞게 미리 준비해 놓은 별도의 과제를 복도에 마련된 의자와 테이블이 있는 학습공간에서 따로 떨어져 나와서 진행하는 것이었다. 학생의 학습상태와 수업의 주제에 따라 형태가 정해졌고 나는 이를 따랐다. 나와 함께 어울렸던 교직원 중에는 Teacher assistant라고 하는 TA가 있었는데 보통 이들은 학부모들이나 일반인 중 8시에서 3시까지 학교에서 담임의 업무를 돕는 역할을 했다. 주로 수업자료 제작이나 학생들의 인솔 등을 도왔다. 나는 학교에서 TA들과 가까워져 아랍어를 배울 당시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또 한국어도 시간내어 가르쳐 주며 친목을 다졌다. 그들은 주로 주변 이집트 등의 주변 아랍국 출신이거나 유럽출신의 학부모들이었다. 나는 아랍국가 출신 TA들과 가까워졌다. 나는 아랍이 왜 중동아시아 국가에 속하는지 피부로 느꼈다. 유럽보다는 우리와 사고방식에서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개인을 중심으로 한 유럽 친구들의 사고방식은 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동양의 사고방식과 다르다고 자주 느꼈는데, 아랍의 국가들은 그런면에서 동양의 사고방식에 가까웠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보다 더 보수적인 면과 덜 보수적인 면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남성중심의 가정생활은 보수적인 면을 보여주었다. 나의 TA친구들의 남편들은 집에 오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요리, 집안일, 아이 돌보기는 모두 여자의 몫이고 여자들은 전업주부이건 아니건 간에 가정생활에 관한 면에서는 여자가 도맡아야 하는 구조였다. 덜 보수적으로 느껴진 부분은 여자의 사회생활과 결혼 등에 대한 면이었는데, 결혼 후 경력단절여성이 많은 한국과는 달리 아랍여성들은 결혼과 무관하게 사회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혼 및 재혼등의 비율이 높아 그에 대한 인식도 한국보다 개방적이었다. 이혼한 여성이나 재혼한 여성도 심심찮게 볼 수 있고, 그들을 특별히 사회적으로 차별하지 않았다.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관심이 많은 내가 쉬는 시간이며 점심시간에 그들과 대화를 하며 이런 것들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어서 아미티에서 일하는 것이 더욱 좋았다.
나는 아미티에서 중등영어보조로 시작해 초등보조, 아랍어 보조 후에는 초,중등 일본어 강의까지 했다. 아미티 근무 1년차에는 나의 대학원 박사과정 이력과 한국에서의 교사경력으로 중등에 배치되었고, 후에는 초등에 분포하는 많은 신입 한국학생들의 보조를 위해서 투입되었고, 아랍어 알파벳을 읽고 쓰고, 단어와 문장을 읽기 시작했을 때 즈음에는 아랍어 수업에 보조로 들어갔다. 아미티에서의 근무가 익숙해지고 나서 일본어 강좌를 열고 싶었다. 영어 모국어 사용자들에게 영어로 수업을 진행해야한다는 부담이 있었지만, 나의 특기인 외국어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기회였다. 학교 안에서 영어로 담임 및 교직원들과 의사소통하고 학생들에게 영어를 알려주면서 처음에는 그에 대한 부담감도 상당했다. 하지만 학교에서 근무하면서 그런 부담감은 서서히 옅어져 갔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학교 안팎으로 다양한 배경의 학생과 교직원, 학부모들이 혼재한 환경의 영향이었다. 사람들의 생각은 한쪽에 치우지지 않고 유연했다.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일상이다보니 각각 다른 그들의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을 하나의 잣대로 평가하는 것이 무의미했다. 그것은 곧 상대를 편견없이 대하고 존중하게 만들었다.
두 번째로 나는 영국학교라는 환경적 특성으로 다수의 영국 또는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출신 교사들과 또 그 외 외국인들과 섞여서 근무했다. 그동안 동양의 유교문화와 한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국의 전통적 사고방식에 익숙해져 있었던 터라 그들이 보여주는 일처리 방식이나 생각의 방향이 매우 신선했다. 동양과 서양 사고 방식의 가장 큰 차이는 그 중심에 어떤 주체가 있냐 하는 것이다. 동양에서는 그 주체가 공동체이고 서양에서는 개인이다. 따라서 동양에서는 개인이 하는 일의 목적과 가치가 공동체의 번영과 발전에 있다. 그래서 개인은 자신을 갈고 닦으며 정진하는 것도 결국은 공동체의 영달을 위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서양은 그 반대다. 공동체에서 일을 추진하고 발전시키는 동력은 개인의 영달이다. 따라서 개개인의 의견을 수렴하고 그 개별성과 독창성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리고 그것들을 반영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개인이나 공동체가 최종적으로 만들어진 산물을 비교하면 동양에서는 조화로움을 위하고 있고, 서양에서는 다채로움을 지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유교걸로 자라와 사회와 부모님이 정한 공동체를 위한 개인의 기여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살아왔다. 하지만 자라면서 접한 다양한 외국 언어와 문화의 영향으로 내적 불균형이 발생했다. 동양적 사고방식과 한국의 가치추구와 나의 고유성과 충돌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개별성이 더 존중받기를 원했고, 사회와 주변은 그것을 이기적이고 튀는 것, 전체에 수렴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피드백을 줄 때가 많았다.
하지만 영국학교에서 근무하면서 그간의 내적 충돌이 자연스럽게 잦아들었다. 나의 잘못을 깎아내고 다듬으려고 했던 한국에서의 모습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생활할 때는 내 삶의 기준과 목표가 나답지 않았다. 전체를 위하고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며 그들과 함께 섰을 때 튀지 않아야 했다. 그리고 그것에 걸맞는 목표를 설정하고 그에 들어맞지 않으면 나를 채찍질했다. 그리고 내가 나를 누르고 제한하며 참고 견디기를 반복했다. 그러자 나와 같이 참고 견디지 않는 다른 사람들을 보는 것이 괴로웠다. 그들은 왜 그렇게도 이기적이고 못됐나 생각하며 나도, 타인도 잘못을 수정해 전체를 위한 좋은 개인이 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규칙 안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었다.
하지만 영국학교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규칙은 개인들이 잘 지내기 위해 만든 약속이지 개인을 옭아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생활과 문화 속에 개인의 고유함이 존중되는 것이 유교문화와 가장 큰 차이였다. 그것은 나를 숨쉬게 했다. 더 이상 나의 개별성으로 나를 채찍질하지 않았고 타인의 생활방식과 생각을 존중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일견 타인과 비슷한 모습으로 비슷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속에는 각각이 만들어온 개인의 역사와 문화가 있다. 그것을 무시한 채 나의 잣대로 나를 짓누르고 상대를 평가하느라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그런 생각을 오래 지니고 있는 내 가슴 위의 무거운 돌이 내려졌고 그 자리에는 나를 바라보고 오롯이 나만의 것을 찾아내고 따뜻하게 바라봐주고 그것을 살뜰하게 키우려는 마음이 자리했다. 그러자 나는 두려울 것이 없었고, 남과 비교하여 또는 내 자신의 전의 모습과 비교하여 앞으로 나아간다는 생각이 아닌 나의 고유성 속으로 깊이 있게 향기롭게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어섰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씩 나의 색깔을 찾아나갔다.
그러자 부족하다고 여겼던 나의 영어도, 나만의 색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했다. 한국 영어교재에 대부분을 차지하는 미국식 영어로 시작해 캐나다인 션탤과 4년간 단짝으로 지내며 캐나다 억양이 섞이고 후에 다양한 책과 영화, 드라마 등에서 또 다른 억양을 접하고 영국학교에서는 영국식 억양을, 아랍인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는 아랍식 발음이 들어간 매우 독특하고 매력적인 억양의 영향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나는 한국 사람이기에 한국식 콩글리시도 녹아 있다. 나의 영어는 총천연색이었다. 그것이 부끄럽지 않았다. 나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영어를 하며 만들어내는 나의 실수도, 모자람도 나의 일부였다. 나는 영어 말고도 잘하는 것이 있고, 뛰어난 면이 있다고 생각하자 영어를 할 때의 부족함은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영어구사의 기준을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는 원어민의 모습에서 나의 고유한 모습으로 옮겨오자, 영어 뿐 아니라 일본어, 아랍어 그리고 언어 이외의 영역에서까지 내가 시도하지 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일본어 방과 후 수업에서 강사로 일하겠다고 학교에 제안할 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