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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 long Jan 11. 2022

뭇국

엄마

  어젯밤에 끓인 닭백숙, 매생이국이 있는데 아침 일찍 뭇국을 끓였다. 우리 막내가 멀리 시험을 보러 가는 날이라 뭇국을 끓였다. 아이들이 시험 보는 날이면 매번 뭇국을 끓였다. 아이가 셋이라 한 아이가 시험이 끝나면 다른 아이가 시험을 보고 릴레이로 시험을 볼 때면 연속 뭇국을 끓일 때도 있다. 아이 셋 다 수능을 볼 때도 뭇국을 끓여서 도시락을 싸줬던 것 같다. 소화가 잘된다는 말을 들은 후부터 시험 보는 날이면 뭇국을 끓였다. 오늘도 무, 소고기, 두부를 넣은 후 대파를 송송 썰어 넣고 뭇국을 끓였다. 있던 무를 다 먹어서 새로운 무로 뭇국을 끓였다.


  새로운 무는 이십 킬로그램 쌀가마에 가득 담겨있다. 엄마가 셋째네 준다고 심어 놓은 무를 외숙모가 캐서 엄마 집 창고에 넣어둔 것을 남편이 가져왔다. 우리 엄마는 매번 우리 집 먹거리가 걱정이셨다. 애가 셋이라 어떻게 먹고사는지 그게 늘 걱정이셨다. 겨우 보행용 유차를 밀고 다니셔야 걸을 수 있는 엄마는 작은 텃밭에 무를 심어놓고 캐야 하는 시기에 뇌경색으로 쓰러지셔서 병원에 입원 중이시다. 어쩌면 엄마가 심은 무는 마지막 무가 될지도 모른다. 차가운 물에 무를 씻으면서 엄마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쩌다 한 번씩 전화를 하면 늘 뭘 먹고사는지를 물으셨다. 잘 먹고 산다고 걱정 마시라고 대답하다가 가끔은 자세한 메뉴를 설명하곤 했다. 그런데 이제는 말씀을 못하신다. 뭘 먹고 사느냐고 물을 수가 없다. 병상에서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할 수가 없어서 머리를 좌우로 여러 번 돌리셨다는 얘기를 동생한테 들었다. 뭐가 불편하신지 걱정이 되면서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눈물이 앞을 가려서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다. 우리 엄마가 말씀을 못하시다니 어느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인지능력이라도 회복되셔서 그나마 다행이지만 시간이 가도 말씀을 못하신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 믿고 싶지 않다. 여기저기 아픈 건 그렇다 치자, 말을 못 하는 건 정말 받아들일 수 없다.


  자식이란 훈장을 달고 내 마음대로 한없이 기대었다. 세상을 살다 보면 그 어느 누구에게든 공짜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세상에 유일하게 단 한분 내 엄마에게는 공짜여도 미안하거나 죄송하거나 얼른 갚아야 한다거나 하는 생각을 안 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내 마음대로 한 없이 그리워하고 한없이 보고 싶어 하고 내 걱정하실까 걱정되어 더 바르게 걱정 안 되게 살려고 노력했었다. 말씀은 못하셔도 당신 걱정보다 지금도 변함없이 자식들 걱정하고 계실지도 모른다. 날마다 날마다 기도드린다.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좋아지시길 간절히 기도드린다.


  다른 자매들 생각은 잘 모르겠지만 나는 늘 우리 자매들은 엄마의 기운으로 평범하고 안정되게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욕쟁이 할멈처럼 시끌 덤벙한 듯 하지만 당 자식을 당신과 한 몸처럼 생각하셔서인지 앞뒤 상황을 듣기도 전에 항상 "네가 잘하지 그랬냐" 그렇게 말씀하셨다. 어릴 적엔 그 말이 억울하고 불만스러웠다. 어느 정도 크고 나서 생각 생각 또 생각한 끝에 스스로 찾은 해답은 당신 자식은 당신이라는 생각으로 "내 탓이오"라는 다른 표현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스물이 넘은 자식들은 부모를 걱정한다는 명목으로 엄마에게 본인들이 부모 인양 "이러지 마세요, 이러면 안 돼요"를 입만 열면 했다. 나는 엄마와 성향이 비슷하여 엄마와 다를 것이 없어서 별로 이상하거나 잘못하신다는 생각을 못하였기 때문에 별로 그런 주문을 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엄마와 단 둘이 있을 때면 "엄마, 엄마는 엄마니까 자식들이 뭐라고 하면 '그러지 말아라' 그렇게 따금하게 말씀하세요."를 부탁하곤 했었다.


  자식들이란 어리석다. 하염없이 주기 바쁜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 엄마가 주신건 천 가지 만 가지인데 받은 건 기억을 못 하고 몇 가지 본인들이 한건 그렇게 자세히 정확히 잊지도 않고 읊는다. 세상을 살만큼  살았는데도 변함없이 엄마 앞에서는 어리석은 자식이다. 물론 내가 봐도 잘 한 자식은 정말 잘한다. 진짜 극진하게 잘한다. 그런데 문제는 본인의 부주의로 본인의 숭고한 효심을 다 까먹는다. 그대로 있으면 주변에서 존경하고 칭찬하고 위해주고 싶어질 정도로 잘한다. 참지 못하고 발설하여 안 하느니만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부모가 자식에게 해서 스스로 공치사한 경우는 못 봤다. 늘 못해줘서 미안하다고 하신다. 그런 부모의 모습을 닮아야 한다. 무슨 이유에서 일까? 왜, 부모는 자식에게 '무조건'이 되는데 자식은 부모에게 그러지 못할까? 살다 보면 그 해답을 깨우칠 날이 올까? 그 해답을 찾으려고 하지 말고 그냥 부모에게 '무조건'을 실천하는 게 답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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