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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 long Jan 22. 2022

고마운 우리 고모

고모

  그러고 보니 이 나이 먹도록 고모라고 불린 적이 없었다. 이모, 외숙모, 큰엄마가  조카들한테 들을 수 있는 호칭의 전부다. 친근하게 다가오는 고모라는 호칭은 불릴 수가 없다. 우리 집은 딸밖에 없어서 난 고모가 될 수 없다. 우리 아버지 형제는 남자가 많고 여자는 딱 한 분이다. 그래서 내겐 유일한 고모다. 우리 고모가 미인대회 나갔더라면 아마도 심사위원들이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일등을 주었을 것이다. 내 눈에는 이젯껏 많은 미인들을 봐왔지만 우리 고모처럼 예쁜 분을 못 봤다. 늘 웃는 상에 이목구비가 빼어나게 예쁜 분이시다. 그런 우리 고모는 정말 겪지 말아야 할 최악을 경험하신 분이다. 험난한 여생을 사신 분들이 흔히 하는 말로 "말 마라, 내 인생이 책으로 쓰면 몇 권이 될지 모른다."이렇게들 말하곤 한다. 그런데 우리 고모는 책을 쓸 수가 없다고 하실 것이다. 말문이 막혀서 할 말을 잃어서 말할 수 없다고 하실 것이다. 애잔하게 다가오는 우리 고모를 떠올려보려 한다.


  엄마가 붙잡고 싶어 하는데 그래도 자식은 낳아 서울로 보내야 한다는데 왜 그런 말들이 생겼는지 한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상경을 했다. 거처할 곳이라고는 딱 한 군데, 우리 고모집이었다. 그때는 우리 고모집은 한 울타리에 한가운데 마당을 둘러싸고 세 가구가 사는 그런 구조의 방 두 칸에 부엌 하나인 전셋집에 살고 있었다. 그런 집에 객식구로 얹혀살게 되었다. 서울을 가서 제일 처음 도로가 팔 차선 그렇게 넓어서 조금 놀란 것 말고는 그렇게 이질감이 들진 않았다. 그런데 우리 고모댁 생활하는 걸 지켜보면서 보면 볼수록 놀라웠다. 나는 평범하게 직장을 다녔고 사촌들은 아직 어렸기 때문에 그렇게 놀랄 것도 없었다. 다름 아닌 우리 고모, 고모부의 생활이 놀라웠다.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 수밖에 없는 생활을 하고 계셨다. 밤낮으로 하루에 매일 이십 시간이 넘는 시간을 일을 하셨다. 잠 다운 잠을 주무시지 못하고 잠깐씩 쪽잠을 주무시면서 일을 하셨다. 그 모습을 보면서 건강이 걱정도 되었지만 우리 고모처럼 열심히 살면 갑부가 될 것 같았다. 도울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지켜보는 내가 그냥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여건이 그러한데도 나를 얹혀살 수 있게 해 주신 것에 대해 지금도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 얼마 안돼서 나는 분가를 했었었다. 어려운 형편인데도 아이들에게나 생활하시는 중에도 단 한 번도 언성을 높이시지 않았었고 늘 헌신적이셨다. 초등학교를 다니는 사촌들은 알아서 식사를 챙겨 먹어야 했고 그런 상황이라 고모는 내가 아이들의 공부를 도와주었으면 하셨었다. 고모의 의중을 알고 고모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사촌동생들을 잘 돌봐주고 챙겨주고 싶었었다. 그런데 그 사촌들이 나는 손님이라는 생각을 갖은것 같았다. 공부도 봐주고 싶었고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말처럼 쉽지 않았다. 어리지만 셋이서 나름의 위계가 있었고 맏이가 너무 강력해서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어려운 시기를 넘기고 고모네는 오래전부터 서울에서 건물주가 되셨고 아이들은 장성하여 자리를 잡고 산다.


  그 시대를 살면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이렇게 끝이 났으면 좋았을 텐데 그 게 전부가 아니다. 고모댁은 원래 농촌에서 농토도 많고 소도 많이 기르는 부농으로 사셨었다. 그런데 지금 있는 삼 남매 말고 위로 아이가 둘이 더 있었다. 그때 큰아이가 초등학생이었으니까 오 남매가 다 어릴 적이었었다. 아이들의 할머니께서 아이들이 방학이라 서울 구경을 시켜주신다고 큰아이 둘을 데리고 서울에 있는 아이들의 작은댁엘 가셨었다. 그런데 찾아간 서울의 일가족은 뉴스에 나왔다. 연탄가스로 일가족이 모두 죽음을 맞은 것이다. 비통하다고 애통하다고 하소연도 못한다. 말문이 막혀서다. 그래서 고모네 아이들은 오 남매가 갑자기 삼 남매가 되었던 것이다. 아프다고 슬프다고 말을 못 한다. 그저 함구할 뿐이다.


  그 후 몇 해 동안 고모부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셨고 고모 또한 같은 마음이셨겠지만 남은 아이 셋을 먹여 살려야 해서 이를 악물고 살아내신 것이다. 그런 일환으로 변화를 가지면 고모부가 정신을 차리실까 하여 일가족이 서울로 이사를 가게 되셨다. 지난 시간들을 잊기 위해서 어쩌면 그렇게까지 열심히 정신없이 일만 하고 사셨는지 모른다. 지금은 많이 연로하셔서 고모부도 고모도 일을 하실 수는 없다. 말수 없으신 고모부는 여전하시고 고모는 여전히 예쁜 모습이실 것이다. 먹먹함을 삼키고 묵묵히 잘 버텨오셨다. 잘 버텨오신 고모부님, 고모님께 감사하고 그 와중에 큰오빠 딸인 나를 받아주시고 머무르게 해 주셔서 마음 깊이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멀리 있는 조카는 두 분 모두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 기원하면서 감사함을 잊지 않고 산다. 아마도 영원히 감사하며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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