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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 long Feb 09. 2022

딸만 있는 우리 집은

딸, 조상

  사극을 보면 가끔 아들을 못 낳아서 온갖 핍박을 받는 며느리가 그려지곤 한다. 우리 집은 우리 아버지가 종손의 맏이였다. 어쩌다 우리 부모님은 한동네에 사는 분들이 결혼을 했다. 딸밖에 못 낳은 우리 엄마는 사극보다 못하지 않는 시집살이를 당하면서 한동네에서 살았다. 딸을 셋 낳고 터울이 많이 진 막내를 낳을 때 그때의 상황이 지금도 선명하게 생각날 정도로 극적이었다. 온 동네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우리 엄마는 넷째를 낳았는데 또 딸이었다. 망연자실이란 단어가 그 상황에 아주 적절하다고 할 정도로 갑자기 심하게 슬펐었다.  어린 내 동생이 태어나던 날의 이야기다.


  시제를 다녀오시면 조상님 뵐 낯이 없다면서 속상해하시던 아버지의 모습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30년이 훨씬 지났는데도 기억이 선명하다. 부모님들께서 아들을 낳으셨다면 아마도 많이 행복하게 사셨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딸만 넷을 낳고 말았으니 어쩌겠나? 딸인 입장에서 별도리가 없지만 워낙 원하시니까 덩달아 우리 집도 남자 형제가 있었으면 정말 좋았겠다고 생각은 했다. 하지만 살면서는 크게 불편함을 모르고 살았다.


  이번 설 명절을 맞아 특별한 상황을 맞았다. 우리 엄마가 구십이 되시려면 삼 년을 남겨 놓고 뇌졸중이라는 중한 병을 얻어 병석에 계시다. 그래서 우리 친정집은 설 명절에 텅 비었다. 우리 조상님들은 처음으로 차례상도 못 받아보시게 되었다. 나는 시댁에서 나물이며 차례상에 올릴 음식을 준비하면서 친정집 생각을 했다. 내 조상님들은 차례상도 못 받아보시겠구나? 나는 왜, 아무도 안 계신 우리 친정집을 가서 엄마 대신 차례상을 준비해서 올리겠다는 말도 못 하고 시댁에서 이러고 있나? 뭐가 나를 이렇게 만드나? 엄마의 존재 자체의 중요성을 실감하면서 참 현실이 먹먹했다.


  아들, 아들이 뭐 별거라고 왜들 저러시나? 딸자식으로 태어난 우리는 뭔 죄로 부모님의 아들 타령을 수도 없이 들어야 하나? 그러면서도 별다른 어려움 없이 잘 살아왔다. 홀로 되신 우리 엄마에게 철없는 아들이 있는 것보다 차라리 딸만 있는 게 낫다는 둥 불필요한 해명 아닌 설명을 해가면서 살았다. 그런데 막상 이번 명절을 지내면서 처음으로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아들이 있어야 하는구나! 잘나고 못난 것은 그다음 문제고 '아들'이라는 이름을 갖은 자식이 필요하구나! 를 처음으로 피부에 와닿게 느꼈다. 우리 부모님이 그렇게 간절히 바라실만하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부모님 대신 내가 절실히 우리 집에 아들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들이 없으니 친정이 없어져 간다는 생각을 피부로 생생하게 느끼면서 아들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여느 때처럼 설날 당일에 텅 빈 친정집엘 갔다. 보일러며 수도는 안전한지, 별 걱정될만한 건 없는지, 이것저것 살피러 들렀다. 이어서 아버지의 산소를 찾아 성묘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말없이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어쩌다 우리 집이 빈 껍데기만 남았는가? 나는 또 왜, 아들이 아니고 딸이어서 다른 집 맏며느리이기만 하는가? 살다 살다 별의별 상황을 다 맞는다. 우리 엄마가 천년만년 사실게 아닌데 나는 왜, 이런 상황을 짐작조차 못했을까? 내가 남달리 조상을 숭배하고 유교적 의식이 투철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서 평범하게 조상님께 차례상도 못 차려 올리는 자손인 게 서글펐다.


  이러다 저러다 시간이 흐르게 되면 이 또한 익숙해져서 당연하다는 듯이 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엄마가 백 살이 되실 때까지만 이라도 우리 엄마 당신 자신을 위해서도 그리고 우리 조상님들을 위해서도 엄마가 쾌차하셔서 우리 집이 텅 빈 집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란다. 어느 집이나 엄마가 집에 계시는 건 그 집 자체가 있는 것이고 엄마가 안 계신 집은 집도 아니다. 말로만 엄마 뱃속이 내 고향이라고 했지 이렇게 엄마 자체가 내 고향인 걸 뼈저리게 느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법으로 라도 딸밖에 없는 집은 무조건 명절에 친정집 먼저 가도록 정했으면 좋겠다. 합법적으로 당당히 내 조상님께 차례상을 차려드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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