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천만다행이다.

인간관계

  사람이니까 누구나가 아파보지 않았던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신체의 아픔보다는 심리적인 아픔을 얘기하는 거다. 사노라면 다양한 모습으로 아프게 다가온다. 그중에서 '배신감'그게 가장 큰 것 같다. 그런데 그 배신감은 애초에 대면 대면한 사람들과는 그럴 일이 없다. 가까울수록 또는 나 혼자 가깝다고 생각했거나 나 혼자 엄청 신뢰하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그 가까움의 거리가 더 가까울수록 배신감이 크다. 신체의 아픔은 약이나 의료적인 치료를 통해서 이겨낸다. 그런데 그 배신감을 겪으면 오래 아프다. 뜻하지 않게 배신감을 직면했을 때 부지불식간에 덩달아서 나도 뭔가를 공격할 때도 있지만 너무 큰 경우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한동안 정지 상태로 있게 된다.

  뭐 그리 사람의 심리는 복잡하고 미묘한지 모르겠다. 무지하다고 할 정도로 단순한 나 같은 사람은 이중적 삼중적인 사람들이 넌덜머리가 난다. 같은 일 가지고도 여러 사람 앞에서 다르고 일대일로 대할 때 다른 걸 보면 같은 사람 맞나 싶을 때도 있다. 정서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한 사람들의 경우 대체로 다중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하지만 본인이 땀 흘려서 무언가를 해내는 사람들보다 손발은 게으르고 욕심만 많은 사람들이 안 좋은 습관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최근에 느낀 사례가 있다. 그전까지는 그 사람에 대해 잘 알지 못했으면서 다 안다고 생각하면서 마냥 아껴주고 싶은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대신 변호해주고 행여나 해를 입을까 봐 다른 사람들이 눈살 찌푸리면 내가 대신 해명하곤 하기까지 했던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의 하지 말아야 할 이상한 행동을 보고 좀 진정된 것 같아서 차분히 타이르듯이 "지금처럼 이렇게 말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었다. 그런데 동문서답식 날카롭고 어이없는 반응을 보였다. 형언하기도 애매한 구석이 있는 그의 짧고 뾰족한 뼈를 뚫을 듯한 그 한마디는 그간의 그에게 보였던 그를 향한 내 애정을 한꺼번에 '마냥 애정 하는 내가 어리석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정서적 뱀파이어(emotional vampire)라는 용어가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지치게 만드는 사람이라는 말인데 상대방에게 피로감, 불안감, 우울감을 준다는 말이다. 몇 차례 더 같은 사람에게 심한 피로감을 느끼면서 너무 힘드니까 내 피가 다 빨리는 느낌을 받았었다. 그런 기분을 느낀 후 우연찮게 '정서적 뱀파이어'라는 용어를 접하고 '아, 정말 그런 경우가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만의 기분 탓이리라는 생각이었는데 실제로 그런 경우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정서적 뱀파이어 성향의 사람을 대하는 해결책은 '피할 수 있으면 피해라.'였다.

  그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우습게도 이런 생각을 했다. '천만다행이다. 그런 사람이 피할 수 없는 내 자식이나 내 남편이 아니라서.'라는 생각을 하면서 안도하게 되었다. 다행이긴 하지만 못내 씁쓸한 마음은 가시지 않는다. 더 슬픈 일은 다시는 곁을 내어주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는 나를 보는 것이다. 분명 해답이 '피할 수 있으면 피해라.'인데 나는 어느새 잊고 다시 가깝게 지내는 그 이상으로 그를 걱정하곤 한다.

  사람 사는 게 정답이 없다. 정답이라고 생각되는 그것마저 그 벽을 허물고 스며드는 그 무언가가 있다. 인간이기에 그놈의 무서운 '정'이라는 것 때문에 피가 빨리든 피가 나든 망각하고 산다. 안타까운 건 반복되는 그 사람의 행동을 보면서 예전에는 몰랐을 뿐이지 원래 그 사람의 성향이 그런 사람이었다는 걸 알게 되면서 고치거나 변화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피하지도 못하겠고 그 사람이 변화될 것 같지도 않은 이 상황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도 끊을 수 없는 애정 하는 마음을 가지고 예방주사 여러 번 맞았으니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사는 수밖에 별 방법이 없다. 사는 게 참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