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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 long Feb 15. 2022

직선과 곡선

성격, 마음

  '사랑둥이, 행복 둥이, 귀염둥이 엄마입니다.' 내 프로필 소개글이다. 우리 셋째는 중학교 1학년 때까지 완전히 귀여웠다. 보통의 아이들은 네다섯 살까지가 귀여움의 유효기간인데 우리 셋째는 사춘기가 오기 전까지 귀여웠으니 이길자가 없었다. 그래서 프로필에 셋째는 귀염둥이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귀염둥이를 최초로 훈육하기 위해 손을 들고 있으라고 했다. 그 귀여움이 한도 초과인 셋째의 손을 들고 있는 모습은 정면으로 볼 수가 없었다. 너무 귀여워서. 훈육은 해야겠고 손을 들게 했고 귀여움에 웃음이 폭발하여 그 모습을 들키면 안 될 것 같아 입을 틀어막고 얼른 뒤로 돌았었다.


  훈육을 해야 하는 마음은 직선이고 귀여움에 웃음이 폭발하는 건 곡선인 마음 같다. 아이들을 기르다 보면 아이들 앞에서의 나의 모습은 '악역'이었다. 그냥 직선일 때도 있었고 진한 직선일 때도 있었다. 바르지 못한 행동이다 싶을 때는 분명하고 완강하게 태도를 취했었다. 그럴 때마다 두 마음이 내 속에서 일렁이었다. '상처가 되지 않을까?,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훈육하는 거니까 언젠가는 이해할 거야.' 이 두 마음이 내속에서 널뛰기를 했다. 그러면서 나의 부족함을 자책하곤 했다. 분명히 부드러운 표현으로도 바르게 가르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텐데 나는 그 방법을 모른다고 나를 자책하곤 했다.


  아이들을 기를 때 내게 한 나와의 약속이 있었다. '약속을 지키자, 매를 때리지 말자, 두세 번의 기회를 주자.' 였었다.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고 실천했다. 그런데 이제 다 커서 아이들과 대화 중에 '엄마는 화를 잘 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고 느끼게 되었다. 두세 번의 기회를 주고 바뀌지 않게 되자 옥타브가 다른 발성을 하게 되었는데 본인들이 부드럽게 말할 때는 바르게 행동하지 못하였다는 말은 안 하고 어쩔 수 없이 평소와 다른 의도된 고음의 표현을 하게 된 엄마만 '화 잘 내는 엄마'로 고착화시켜버렸다. 좀 억울한 면이 없지 않지만 어쩌겠나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데 말이다. 막내가 대학에 입학하고부터는 아이들을 향해서 고음을 낸 기억이 없다.


  아이들을 잘 키워보겠다고 이십여 년을 초집중하면서 살았더니 내가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래도 결혼 후 십 년까지는 둥글둥글했었고 사람들과 대화 중에는 자연스럽게 유머가 생활화되어 흘러나왔었던 내가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다. 전장에 나선 철갑을 두른 장군이 되어 있었다. 아이들이 나를 '화 잘 내는 엄마'로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글둥글하고 유머하기 좋아하는 나를 찾고 싶다. 지금의  나도 나인 것은 분명한데 예전의 나를 찾고 싶다. 몸은 뚱뚱해졌는데 성격은 살은 없고 뼈만 남아 있는 것만 같다. 앙상하고 뻣뻣한 내 모습이 짠 하다.


  예전의 나니 지금의 나니는 별 문제고, 부드럽고 따뜻한 사람으로 거듭나고 싶다. 뭐 얼마나 잘 살아보겠다고 날을 뾰족하게 세우고 발버둥을 치는지 내 모습이 안타깝다. 아이들 기르는 것도 그렇지만 직장에서 일하는 것도 어떤 일을 보면 형식에 맞게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일을 하면 되는데 내 존재의 이유와 이 일의 원 목적이 무엇인지 그 목적을 위해 바로잡으려고 노력해버린다. 누군가가 내 마음을 눈치챘다면 어이없어할지도 모른다. 급여의 가벼움 대비 일을 대하는 마음이 그런 마인드라니? 할 것이다. 그래도 좋다. 나는 나다.


  큰일이다. 가만 보면 부드럽고 싶다고 말은 하면서도 아직도 총칼을 든 전사다. 알게 모르게 총칼을 든 전장에 선 나를 나는 즐기고 있는 것도 같다. 그 속에서 멋진 나를 찾으려고 하는 것도 같다. 어쩌면 진한 직선에서도 강한 전류가 흐르고 있을 수도 있다. 열정이란 이름으로 말이다. 나를 나무라지만 말자. 직선으로 변했다고. 어느 시기든 그 역할이 있다. 그 시기에 맞는 역할을 한 것일 수도 있다. 이제는 충분히 본인의 역할에 충실하였으니 여유를 갖고 부드럽고 따뜻한 모습을 찾아가도 될 것 같다. 수고했다. 그만 인색하자. 인심 좀 쓰자,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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