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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 long Dec 10. 2022

인정 욕구

부모, 자식, 나

  가끔 이해되지 않는 나의 모습을 본다. 스스로 생각하는 나도 이해되지 않지만 주변인들의 말속에서도 확인한다. "애늙은이 같다.", "인생 2회 차인 거 아니냐?"이런 말들을 들었다.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한 의문은 아들을 갈망하는 딸만 넷인 집안의 셋째인 나는 어떻게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을까? 하는 거다.


  절대 당신의 심중을 들어내시지 않으시던 엄마는 어떤 계기로 내게 말씀하셨다. "너를 많이 믿고 의지했다."라고 하셨다. 엄마가 병석에 눕기 얼마 전의 일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내가 평생 지지하고 응원했던 내 동생이 나를 몸부림치도록 배신감을 느끼게 하여 내 동생에게 되돌려주려고 했던 말들을 동생을 통해서 엄마가 듣게 되어 내게 큰 실망을 하셨던 터에 하신 말씀이었다. 엄마에게 불손하게 대하는 동생을 엄마를 위해서 동생에게 그러지 말라는 거였는데 동생이 내게 핵폭탄급 한 마디를 하여 시작된 일이었다. 시작은 엄마를 위하는 마음이었는데 엄마는 동생을 변호하고 내게 서운한 마음을 보이셨었다. 끝은 엄마 께든 동생에게든 나의 사과로 마무리되었었다.


  전쟁 같은 불편한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도 나는 절대 심중을 들어내지 않는 엄마께서 "너를 많이 믿고 의지했다."라고 하신 그 말씀을 되새기면서 감사해한다. 뿐만 아니라, 바로 위 언니에게 두 언니들은 더 많은 고생을 하였을진대 "영미는 고생을 많이 했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그리고 잊을 수 없는 눈물겨울 정도의 감사한 한마디가 있다. 결혼을 앞둔 내게 "빚을 내서라도 너를 대학을 보냈어야 했다."라고 한 엄마의 한마디다.


  가정 형편을 알고 취업 후 신설동 단과 학원을 다니면서 공부의 갈증을 달래면서도 엄마에게 단 한 번도 "대학을 가고 싶어요."라는 말을 못 했었다. 결혼 후 큰아이가 초등학교 입학 전 나는 졸업을 목표로 대학을 다녔다. 그래서 그 꿈을 이뤘다. 그런 마음을 먹은 건 내 아이들을 향한 편견을 갖게 하기 싫어서였고 우리 엄마의 맺힌 마음을 풀어드리기 위해서 아이 둘을 낳으면서 사 년 만에 대학을 졸업했었다.


  결혼을 앞두고 직장의 상사께서 값진 선물과 함께 엽서 한 장을 주셨다. "너를 길러 우리 직장에 보내주신 어머님께 감사하다고 전해다오." 미래의 남편, 시부모님을 언급하면서도 덕담을 곁들였지만 잊히지 않는 그 한디가 호랑이 같던 상사의 입을 통해 듣게 되어 감회가 남달랐었다.


  아이를 셋씩이나 낳아 기르면서 좌충우돌 매번 초보티 확실하게 내면서 육아를 했었다. 가끔 열이 나면 나는 옷을 벗겨야 된다고 하고 남편은 옷을 두껍게 입혀야 된다며 의견 충돌도 하면서 아이들을 길렀다. 뿐만 아니라 나는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해야 된다는 생각을 갖고 매번 아이들과 함께 뛰었었고 남편은 본인 성장기를 언급하면서 부모님이 단 한 번도 공부하라는 말씀을 하지 않았다면서 공부는 스스로 알아서 하는 거라는 남편의 의견과 달랐다. 많이 힘든 시간들이었다. 그런 남편이 아이들 교육을 위해 이사도 제안해서 이사도 했다. 아이들이 수능을 보고 성과를 내면 남편은 "엄마 덕분이다." 이 말을 잊지 않고 했었다. 그 한마디로 힘든 시간들이 눈 녹듯이 녹아내렸었다.


  최근에 TV에서 '슈룹'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되었었다. 큰아이가 "엄마, '슈룹' 보셨어요? 주인공이 엄마 같아요."이렇게 말했다. 평생 동안 시기마다 나는 내게 해 준 한마디를 목숨처럼 귀하게 받아들이면서 힘을 얻고 산다. 우리 큰아이가 한 그 한마디는 내게 고마움과 미안함에 대한 안도감을 동시에 느끼게 해 준 말이었다. 큰아이를 기르면서 가장 많이 고민했었다. 나의 역할의 정도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워낙 적극적이고 의욕적인 아이라 그냥 둬도 멋지게 성장할 것만 같다는 생각과 그래도 간섭이 될지어도 관심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늘 시소를 탔었다. 어쨌든 첫 아이라 부족한 엄마 덕분에 고생이 많았다. 우리 큰아이는. 그런 큰아이가 엄마를 그렇게 받아들였다는 게 고맙고 또 고마웠다. 고생이 정말 많았다고 생각하여 수능 끝나고 미국 여행도 보내주고 마음의 상처가 될 수도 있었던 과정을 희석시키려고 애썼는데 고맙게도 엄마를 안도하게 하는 한마디를 해줘서 고마웠다.


  애 늙은이 같다는 평을 받고 살았던 건 스스로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기억나버리는 일화들이 있다. 할머니와 함께 살아서 할머니의 아들이자 나의 작은아버지들께서 취해서든 자주 우리 집엘 오셨었다. 그때마다 나는 작은아버지를 달래고 얼르고 하여 강이 바라다보이는 언덕에까지 같이 가서 하시고 싶은 얘기를 들어드리고 술기운이 가시면 귀가하실 수 있도록 했었다. 최근에 내 손 윗분들이 아무 말 대잔치를 하자 난 또 단톡에 애늙은이 같은 바른말을 해댔다. 이제는 그런 내가 싫다. 벗어나고 싶다. 나도 마음껏 투정 부리고 누군가의 다독임을 받고 싶다. 뒤늦었지만.


 듣지 못하고 다 기억하지 못하는 아주 어린 시절도 무언가 깊은 인정과 사랑을 받았을 거라는 추측을 한다. 결핍이 더 많았을 것만 같은 가정환경에서도 난 큰 흔들림 없이 지금 내가 될 수 있었던 거는 를 향한 따뜻한 손길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최근까지 나의 에너지는 칭찬이라고 생각했었다. 칭찬과 인정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고 내 삶을 지탱할 수 있었던 건 시기마다 깊이 나를 인정해주는 감사한 분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걸 알았다.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분들이 나를 인정해주었다. 부모님, 직장 상사, 남편, 자식들에게 감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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