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검진'이라고 병가를 내고 병원엘 갔다. 중병을 앓고 주치의의 졸업 선언을 듣고 집 근처 병원으로 일 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으라는 소견서 같은 걸 들고 병원엘 간 것이다. 여전히 떨렸다. 같이 걱정하는 남편을 향해 "5월에 건강검진 했는데 별일 없다고 했어 걱정 마."라고 마치 나를 다독이듯이 말하고 병원엘 간 것이다.
몇 번의 수술을 담당했었던 익숙한 의사 선생님을 뵙게 되니 반갑기까지 했다. 그 와중에도 어쩔 수 없이 긴장하고 있는 얼굴은 굳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반가웠다. "일 년에 한 번 가을이면 검진하는 날로 알고 계세요."라고 말하며 초음파를 쓰윽쓰윽해갔다. 얼마동안 그렇게 해가더니 "크게 걱정하실 건 아니지만 지켜봐야 할 것이 두 개 있습니다. 육 개월 후에 다시 봐야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따가운 가을볕을 손으로 가려가면서 한 시간여를 처벅처벅 걸었다. 밀폐된 작은 공간에 갇힌 기분을 살살 달래가면서 걸었다. 빼꼼히 스며드는 빛을 발견하려는 듯이 '이 나이에 혹 한두 개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평범한 사람들처럼 걱정의 마침표를 서둘러 찍었다. 그렇게 집 앞엘 왔다. 일층 현관 비번을 누르고 엘리베이터를 타야 하는데 날마다 자동으로 누르는 비번을 이렇게 저렇게 몇 번씩 눌러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 한참을 누르다가 밖으로 나오는 이웃에게 "입구 비번이 뭐예요?"라고 물었다.
겁쟁이, 나의 의식과는 무관하게 나의 무의식은 여전히 떨고 있었다. 홀로 걸으면서 졸업장을 받은 후 커피도 하루에 한잔씩 했던걸 일주일에 한잔씩 하겠노라고 내게 약속을 했고, 찌는 살도 적어도 육 개월 후엔 이년 전의 몸무게로 만들겠다고 다짐을 했다. 스스로를 단속하는 그런저런 생각을 정리하면서도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나는 내 속에서 한참 떨고 있었던 것이다.
만병의 근원은 스트레스라는데 직장에서 올해 상반기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견뎌냈었다. 지금은 평온하지만 새로 부임해 온 상사의 감당하기 힘든 언행으로 그리고 그로 인해 파생된 가까운 이의 본색을 드러내는 행동으로 많이 힘들었었다. 정면돌파로 힘든 고비는 잘 넘겼지만 지금도 생각나는 쓰나미급 스트레스는 내게 악영향을 끼쳤으리라는 추측을 하게 한다. 그런 측면에서 직장을 계속 다녀야 하는지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두려움이란 간절히 지키고 싶은 게 있으면 생기는 감정이라고 들었다. 본능일까? 본인의 생명을 지키려는 건. 그 두려움의 시작이 내 생명을 소중히 생각하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내 본심을 읽게 되었다. 스스로의 생명을 소중히 생각하는 건 부인할 수 없는 본능이었다.
평온한 마음으로 산책을 하면서 이 세상에 태어나 아이 셋 잘 길러냈으니 태어난 목숨값은 한 게 아니냐는 생각을 했었다. 스스로를 호평하면서 이쯤 살았으면 내 목숨에 대한 더 큰 욕심은 그만 부려도 되지 않냐는 나와의 대화가 생각난다. 그럼에도 내 속 마음은 더 건강하게 더 오래 살고 싶은 거였다는 걸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두려움 앞에서 들킨 것 같다.
진정, 나를 맞이할 나는 내게 인색한 사람이었던 걸까? 막내가 수능 시험을 본 후 일주일쯤이 지나고 큰 병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아이 셋을 대학에 보내고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찰나에 병을 맞이한 거다. 스스로는 스스로를 보살피지 않겠거니 생각해서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나를 보살피라고 병을 준 거라는 해석을 했었다. 그런 병이 유한했으면 좋겠는데 계속 나를 긴장상태로 두려움에 떨게 한다. 아마도 계속 정성을 다해 나를 보살피라는 명령 같은 거라고 받아들일 수밖에 별도리가 없다.
어린 시절 아무도 겁먹지 않았던 일에 나 홀로 심한 공포에 몸서리쳤던 기억이 있다. 우리 집 하늘 위를 나는 비행기 소리가 날 때마다 나는 소리치며 펑펑 울면서 이불속으로 피신하곤 했었다. 평범한 사람들과는 좀 다른 나만의 취약한 포인트가 아마도 두려움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공포나 두려움에 노출되었을 때 유난히 더 크게 느끼는 생물학적 본성이 있는 거라는 추측을 한다는 것이다. 의식적으로 조절이 어려운 영역인 건 맞는 것 같다.
두려움을 피하려 하지 말고 그 속으로 들어가서 극복하라고 하는데 스스로도 어쩌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 나인 것 같다. 키가 작지 않은 편이라 다리가 길어서 자전거는 타는데 눈앞에 사물이 나타나면 나도 모르게 심하게 핸들이 바들바들 떨고 있는 걸 봐도 그렇고 사람이면 다 따는 운전면허도 시작도 못하는 걸 봐도 좀 그 방향으로는 많이 결격자인 게 분명하다.
변명 같지만 그 외의 의식적인 행동에는 남다른 용기가 있다. 손해나 피해가 예상되는데도 도전하고 실행하는 몸을 사리지 않는 용기가 스스로 평가할 때 있는 게 분명하다.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부분에서 부족한 건 쿨하게 인정하자. 두려움, 스스로를 단속하는 제어 조절 장치로 여기고 뚜벅뚜벅 함께 살아가자. 사는 날까지 동행할 수밖에 없다면 별도리가 없지 않겠는가 받아들일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