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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 long Aug 19. 2021

선택의 순간들

중요한 결정

  시간, 공간 그리고 그 속에 움직이는 사람, 사람이 산다는 건 매번 선택의 연속으로 오늘과 내일 그리고 그다음 날로 이어지면서 우리의 삶은 선택의 사슬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런 와중에 그 선택의 결과로 큰 변화를 일으키기도 하고 후회라는 부산물을 낳기도 한다. 살아오면서 유난히 이십 대 때 나보다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 누군가가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간절하게 했었던 기억이 있다. 그 후로도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중요한 선택을 해야 될 일들이 계속되었다. 살아있기에 살아 있음의 증거처럼 선택의 순간은 계속되었다.


  이십 대 때, 그때 사회적인 분위기가 민주화 바람과 함께 노사분규가 절정을 이루던 시절이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다니던 직장이 노사분규로 어수선했었다. 그런 분위기가 계속되고 언론매체가 직장을 취재하고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기도 하고 지금 생각하면 격동의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 속에 몸담고 있노라면 격하게 고민하게 된다. 이곳을 계속 다녀야 하나? 다른 직장을 찾아야 하나? 진하게 고민했었다. 그럴 때면 '나보다 나를 더 생각해주면서 좋은 선택을 해 줄 누군가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으로 꽉 차 있곤 했었다. 그 중요한 시점에 현답을 해 줄 누군가가 없었다. 혼자 날마다 날마다 고민하다가 결국은 퇴직했었다. 퇴직 후 한 달여 만에 다시 직장의 요청으로 복직했었다. 퇴직도 복직도 그 당시엔 참 어려운 선택이었다.


  또 다른 중요한 선택의 순간이 있었다. 그건 바로 결혼이다. 그때는 지금과 달리 결혼 적령기라고 하는 시점이 좀 빨랐다. 이십 대 중후반의 여성은 완전 올드미스 대열에 속했다. 나이는 꽉 찼고 결혼은 해야 될 것 같고 해결 방법은 선을 봤어야 했었다. 그 과정을 겪으면서도 생각을 공유하면서 의논하고 부족한 생각을 채워 줄 누군가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많이 했었던 것 같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지금 생각해 보면 결혼과 출산은 나의 선택 같지만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란 생각이 더 진하게 들었다. 인간의 선택 그 이상의 영역의 권한으로 이미 정해진 운명이란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운명이든 선택이든 운명적인 선택이든 결혼이란 관문을 통과하여 그때부터 새로운 선택의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고 근무지를 바꿔서 이사를 했어야 했다. 아이가 성장해 가면서 아이의 진로를 함께 고민하고 결정하고 앞으로도 아이가 직장을 선택하고 그리고 결혼하게 되면 고민하고 선택하는 과정을 지켜봐야 할 것이다. 이처럼 내가 겪은 인생 주기를 자식들이 선택이란 계단을 밟으며 한 계단 한 계단 살아내는 게 인생인가 보다.


  언젠가 나처럼 선택의 기로에 서서 고민하다가 내게 전화를 한 사촌 동생이 있었다. 결혼하여 어린 자녀가 있는 동생은 인사이동 시기가 되어 근무지를 이동해야 되는데 지역을 어디로 결정해야 할지 고민이 된다고 그간 연락이 없었는데 물어물어 내 연락처를 찾아 의논을 해 온 것이다. 내가 아는 주변 상황을 고려하여 성의껏 의논에 응답했던 기억이 있다. 그 동생에게 도움이 되었길 바라면서 한편으로는 부족한 나를 찾아 의논하려 한 그 동생이 내심 고맙게 여겨졌었다.  


  사람이 사는 게 그렇다. 한 발 물러서서 보면 그렇게 큰일도 아닌데 당장 내가 그 중심에 있게 되면 엄청나게 크고 어렵게 느껴지곤 한다. 그때마다 주변을 둘러보며 지혜를 나눠줄 사람을 찾게 된다. 내가 살아 낼 때 누군가의 손길이 간절했듯이 내 자식, 내 형제, 내 이웃이 내게 손길을 내밀었을 때 도움이 되는 성숙한 사람이고 싶다. 그리고 선택의 순간 당연히 잘 결정해야 되지만 결정 후의 노력과 정성이 그 선택을 완성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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