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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 long Sep 05. 2021

우리 엄마

우리 엄마

  언젠가 굴곡진 삶을 살아 낸 내 친구가 "말 마라, 내 인생은 책 한 권으로 부족하다." 이렇게 말었다. 그런데 구십을 코앞에 둔 우리 엄마는 살아낸 연륜만으로도 책 한 권이 문제가 아니라 대하드라마 정도 되지 겠는가? 아주 평탄하게 살았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우리 엄마가 살아 낸 자취를 책에 담아본다면 장편소설 감이다. 나라면 그 모진 세월을 버텨냈을까? 그 모진 세월을 견뎌주신 덕분에, 끝까지 우리들의 울타리가 되어주신 덕분에, 온몸으로 비바람 막아주신 덕분에 당신의 자식들이 건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감사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우리 딸이 초등학교 다닐 때 존경하는 사람을 적어 내라고 하면 '이순신 장군'이라고 써냈다. 나는 존경하는 분이 우리 엄마다. 자식 넷 중에 동생은 나와 같은 마음일지 모르지만 위로 두 명은 그런 나를 의문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욕쟁이 할멈처럼 매번 우리들을 나무라는 분이셨으니까, 그런 엄마를 존경까지 한다고 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우리 엄마의 따뜻한 마음을 일찍부터 읽어 냈던 것 같다. 나는 결혼하기 전부터 우리 엄마를 존경했었다. 결혼해서 우리 아이들을 엄하게 훈육하면서 마음속으로 '내 아이들을 사랑하니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미안한 마음을 달랬었다. 우리 엄마도 우리를 나무라시는 중에 우리를 깊이 사랑하신다는 걸 내가 먼저 느낀 것이다. 당신의 본마음을 숨기고 겉으로 세게 표현하시는 엄마가 때론 안타까웠고 속마음이 뭔지 깊이 생각해야 했었다. 


  우리들이 잘못하지 않았더라도 매번 나무라는 어투로 "너희들이 잘하지 그랬냐?"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려서 들을 때 그 말이 서운하고 때론 억울했었는데 "매사에 '내 탓이오' 하거라"의 다른 표현이었던 것 같다. 어려운 가정 형편을 이끌어 가시느라 정말 말로 형언할 수 없이 많은 고생을 하셨다. 고생하신 까닭에 지금의 내 나이보다 어린 나이에 척추, 좌골 등의 뼈가 온전하지 않아 바르게 서지도 못하셨고 걷는 것도 정상적이지 못하셨다. 어느 한편으로는 고단한 마음을 몸을 혹사시키면서 잊으시려고 하는 측면도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부족한 부모 때문이라면서 자식들에게 늘  미안해하셨다. 뜨거운 눈물을 참느라고 일터로 나가시는 모습 어린 내 눈에까지 보였다. 그야말로 분골쇄신, 희생과 봉사의 일생을 살아 내셨다.


  아버지랑 삼십 년을 사셨고 아버지 안 계신 사십 년을 살아 내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엄마가 아버지 일을 다 하셨다. 겁 많은 엄마는 속으로 바들바들 떨면서 겉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 아버지 일을 해내셨다. 그러면서 자식들을 보호하고 키우기 위해서 점점 센 엄마가 되셨다. 그리고 아버지 계실 때뿐만 아니라 안 계신 이십 년이 넘는 시간을 홀로 할머니를 모셨다. 이웃마을에 사시는 작은아버지 댁으로 가시기 직전까지. 뿐만 아니라 큰며느리 노릇을 하시느라고 지금도 제사를 모신다. 당신 식사도 겨우 하시는 형편인데도 말이다.


  우리 엄마를 짧게 표현하자면 생활면에서 검소하시고 남달리 근면 성실하신 분이셨다. 누군가에게 신세 지는 걸 못 견뎌하셨고 십을 받으면 적어도 십일을 갚는 분이시고 주변 사람들에겐 마치 거부나 되신 것처럼 통 크게 쓰신다. 그리고 깊은 뿌리가 있는 듬직한 분이시고 총명하시고 지혜와 용기가 있는 분이시다. 어려운 현실을 잘 이겨내셨고 자식들 짐이 안되시려고 부단히 도 노력하신다. 어떠한 경우도 당신 한 몸 건사하실 수 있는 준비를 해놓으셨다.


  우리 엄마는 유난히 당신께 인색하셨다. 보통사람의 경우 병원에 한 달 정도 입원했을법하게 아파도 안 아프다고 괜찮다고 하셨다. 어떨 땐 '왜, 저렇게까지 참고 고집을 부리실까?' 하는 답답한 마음이 들 때가 있었다. 매번 전쟁터에서의 투사인 것처럼 보였었다. 아마도 칠십이 되실 때까지는 그러셨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는 '같은 분인가?, 우리 엄마가 맞나?' 할 정도로 매일 아프시다고 표현을 하셨다. 당황스럽고 낯설었다. '그동안 못했던 표현을 다 하고 말겠다는 마음이신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자식들에게 관심을 받고 싶은 마음이신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저러나 당신이 아프고 힘드시더라도 이겨내시고 계셔서 감사할 다름이다.


  나는 휴대폰 입력할 때 거의 다 이름 석자를 쓴다. 우리 엄마는 '내 엄마'로 입력되었다. 내 엄마는 내겐 각별하다. 결혼 전까지는 건강을 위해 끊이지 않고 보약을 챙겨드렸고 제법 엄마를 위해 행동했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부터는 시부모님께 해드린 것의 10%만 우리 엄마께 해드렸으면 효녀 비를 세웠을 거라고 말할 정도로 우리 엄마께 등한시했었다. 시부모님께는 매주 찾아뵙고 우리 엄마에게는 무슨 일이 있거나 명절 그리고 행사 때 정도만 찾아뵈었으니까. 그러면서 속으로 '시부모님께 잘하는 게 우리 부모님 욕보이지 않는 일'이라고 위안했었다. 참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결혼해서 처음부터 시부모님과 우리 엄마를 동등하게 모셨어야 했다. 엄마를 뵐 낯이 없다. 감사한 마음과 존경하는 마음이 있으면 행동해야지 그게 진심인 거지 마음뿐이면 그게 무슨 진심이겠나? 뵐 낯 없는 불효 막심한 딸은 오늘도 내 마음대로 내 엄마를 존경하고 사랑다. 부디 지금처럼 이라도 건강 유지하시길 바랄 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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