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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 long Nov 04. 2021

섬에서만 안 살아봤다.

사는 곳

  오십이 넘으니 참 다양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나이가 많다고 다 그런 건 아니겠지? 아마도 점쟁이가 말한 팔자 운세 풀이에 역마살이 있는 까닭일까? 무슨 기록이기에 팔자까지 들먹이는 걸까? 다름 아닌 내가 지금까지 살아보았던 곳들의 이야기를 펼쳐볼까 한다. 나는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어느 정도 장성하여 서울살이를 하였고 결혼하여 다시 농촌이라고 해도 될만한 중 소 도시에서 적잖게 살았고 지금은 대도시에서 산다. 그러고 보니 섬에서만 안 살아봤다.


  나의 농촌생활은 자연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던 아름다운 시간들이었다. 유난히 감수성이 예민한 편이었던지 동트기 전 새벽의 하늘, 동이 트고 동네 앞의 강에서 피어나는 물안개, 멀지 않은 곳에 바다가 있어서인지 너무나 아름답게 그곳으로 기우는 석양, 밤하늘에 쏟아질 것 같던 수많은 별들, 날마다 감동하면서 그 모든 것을 잊히지 않은 깊은 기억 속에 저장해놓았다. 자연만 아름다웠던 건 아니다. 고만고만한 또래와 지칠 줄 모르고 뛰어놀았던 어린 시절, 유난히 채집에 능했던 언니와 나는 동네 친구들과 철마다 봄나물 산나물 강에서 고동 잡는 것 등 다양한 먹거리 채취활동들을 했었다. 뿐만 아니라 철마다 부모님의 일손을 거들던 준농부 생활도 당연하게 한 몫했었다. 동네가 한 성씨의 집성촌이라 온통 촌수의 숫자 문제지 모두가 일가친척들이었다. 그래서 한 해를 살아내려면 집집이 제사가 돌아가면서 있어서 음식을 나누는 정도가 아니라 때마다 돌아가면서 그 집에 가서 식사를 했었다. 명절이면 마당에 멍석을 깔아놓고 어른들에게 돌아가면서 절을 했었다. 그때는 그렇게 그런 생활이 절절하게 좋은지 모르고 당연하게만 생각했었다. 지나고 보니 농촌에서 태어나서 자란 건 행운인 게 분명하다.


  '사람은 낳아서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도로 보내라.'는 말처럼 어느 정도 성장하여 서울살이를 했다. 촌놈이 서울살이를 하려고 하니 별의별 생각이 많았다. 제일 걱정되는 건 서울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까? 그때는 흑인종, 백인종들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까? 수준의 걱정이었다. 그곳 서울 생활하면서 화려한 다양한 면들을 보았지만 처음으로 길거리에서 순대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었던 기억이 가장 쇼킹했었던 것 같다. 지금은 좋아하는 간식거리지만 그때는 '세상에 어떻게 뱀 모양의 것을 똬리를 틀어놓고 보란 듯이 거리에서 팔 수가 있을까?' 유난히 뱀을 싫어하는 이유에서 더더욱 놀랐었던 것 같다. 그것 말고 나쁜 기억은 밤늦은 퇴근길에 열 살 안팎의 어린 남자아이가 전철역에서 내려 집으로 오는 골목길까지 계속 따라오는 것을 꼽을 수 있다. 이유는 갈 곳이 없다고 우리 집엘 데려가 달라는 것이었다. 무서웠다. 그것 말고는 서울은 좋았다. 집이 한강변에 있어서 아침이면 한강변을 조깅하였고 주말이면 북한산을 오르고 그곳 생활도 어느 곳이랑 별 다를 것 없었다. 서울에서 만난 사람들은 대체로 좋았었다. 힘든 일들도 의기투합하여 열심히 해냈었고 서로 의지하고 배려하면서 정을 쌓아갔었다. 지금도 그리운 사람들이다. 처음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남편의 인사이동으로 작은 도시(?)를 옮겨가면서 아이들이 적극적으로 학업에 전념해야 되는 시기 이전에는 그곳에서 살았었다. 가까운 바다와 산들도 많이 찾아다니면서 여유로운 생활을 했었다.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 오기 전에 살던 곳은 그때 생각으로는 그곳에서 평생을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우리 아이들도 그곳을 무척 좋아한다. 아이들의 고향 같은 곳이다. 나도 그곳이 좋았다. 주변 경관도 아름답고 살만한 곳이었다. 지극히 나의 주관적인 생각으로는 서울의 축소판처럼 산과 강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는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내가 좋아하는 그림을 배우고 매년 전시회도 하면서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과 옹기종기 사는 게 정말 좋았다. 간혹 문화행사 등 크고 작은 행사에서 봉사활동도 하면서 의미 있는 생활을 할 수 있어서 여러모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아이들의 교육을 이유로 아이들의 아빠가 적극 희망해서 살게 된 곳이다. 아이들의 교육에는 나름의 소신이 있었던지라 굳이 꼭 이렇게 이사까지 했어야 하나 하는 생각을 조금은 갖고 있었지만 그래도 남편의 생각도 한편으로는 맞다는 생각을 하였기에 기꺼이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이곳 물정을 모르고 남편의 직장 동료들이 주로 사는 곳이라 그분들이 그곳에서 사는 것은 필시 이유가 있겠거니 해서 무작정 아이들과 함께 탐방을 했다. 아이들에게 초등학교를 찾아가서 어느 곳엘 다니고 싶냐고 의견을 듣고 아이들이 원하는 초등학교가 있는 곳으로 이사를 했다. 이전에 살던 곳과는 많이 다른 교육환경이었다. 어떤 기준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이곳은 최고의 학군이었다. 멋모르고 코끼리 뒷다리 만지듯 주변 사람들의 선택지를 따랐을 뿐인데 대단한 곳이었다. 전쟁터 같은 이곳에서 세명의 아이들을 키워 모두 대학을 보냈으니 목적을 이룬 곳이다. 그리고 적절히 생활에 필요한 것들이 잘 갖춰진 곳이라 이곳이 좋다. 대도시에서 농촌의 딸은 작은 텃밭까지 일구면서 살게 되었으니 바랄 게 없다.


  앞으로는 어떤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될지, 이곳에서 계속 살게 될지는 모르지만 이제까지 살았던 곳들은 참 좋았다. 간혹 이사를 하면서 사람, 자연, 살았던 집들과 헤어져야 해서 적잖게 힘들었지만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수많은 아름다운 추억은 더욱 다채롭지 않았나 생각한다. 어느 곳이나 사람 사는 곳은 비슷비슷하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아직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섬살이는 퇴직하고 '한달살이' 같은 형식으로 제주도에서 살아보면 어떨까? 하는 작은 소망을 갖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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