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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 long Dec 03. 2021

공감, 그 고마운 마음

귀한 마음, 공감.

  고구마를 먹을 때는 동치미가 있어야 제격이다. 사람들이 살면서 하루에 해야 되는 최소한의 말의 양이 정해져 있다는 말을 들었었다. 그래서 아무리 말수가 없어도 알게 모르게 어느 정도의 말은 하고 산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란 사람은 무언가 속상한 일이 있으면 누군가에게 그 말을 풀어야 숨이 정상으로 쉬어진다. 속상하게 한 당사자에게 푸는 게 가장 빠른 치유법인데 그렇지 못할 상황이면 누구라도 들어주기만 하면 쏟아내야 살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궁금하다. 유별나게 나만 그런가 싶은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어찌 되었든 나를 숨 쉬게 해주는 동치미 같은 사람은 다름 아닌 내 남편이다. 그저 듣고만 있어줘도 내가 살 것 같은 걸 보면 그래도 성의껏 들어주는가 보다. 고마운 사람이다. 상담을 할 때도 잘 들어주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들었다.


  어쩌다가 이런 글 쓰는 공간을 알게 되어 이런저런 나도 몰랐던 나까지도 글로 옮기게 되었는데 적잖게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이 되어주는 것을 느낀다. 내 지인들은 두세명 글을 읽어주고 이름도 성도 모르는 분들이 꾸준히 내 글을 읽어주신다. 진심으로 감사함을 느끼면서 어떤 면에서는 미안한 마음도 갖고 있다. 왕초보인 내게 꾸준히 그리고 묵묵히 제 얘기를 들어주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리면서 들어주시는 분들의 그 귀한 마음이 큰 힘이 되어 오늘도 이렇게 글을 옮기게 된다.


  내게는 귀한 친구가 있다. 서로 어느 누구에게도 말 못 할 그런 말을 여과 없이 할 수 있는 친구다. 마치 고해성사를 하듯이 그렇게 그 어떤 경계심도 없이 모두 말할 수 있는 친구다. 그날도 엄마를 새벽같이 뵈었다. 엄마는 앰뷸런스를 타고 병원을 옮기셨다. 그리고 뒤늦은 출근을 하려다가 한 시간여의 시간이 있어서 병원 근처에 있는 그 친구를 만나서 점심식사를 해결하려고 했는데 비가 오는 이유이기도 하고 밖으로 나오기에는 시간이 필요했던지 집으로 오기를 권해서 찾아갔다.


  아픈 엄마를 생각하며 속상한 마음을 풀어내고 따뜻하게 챙겨주는 먹을 것을 먹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무신론자인 나는 그 친구의 강력한 전도를 이제껏 잘 견뎌왔다. 그럴 때마다 속으로 '내게 종교의 자유를 다오.' 하면서 예수님 말씀이라는 그 말을 듣곤 했다. 때마침 엄마가 편찮으시니까 더 교회 다니기를 강권했다. 예전부터 그 친구는 교회를 다녀야 죽어서 천당을 간다고 하면서 꼭 교회 다니기를 권했다. 내가 다 좋은데 교회만 다니면 더 좋겠다는 게 그 친구의 생각이다. 나란 사람은 혹시 천국이 있다면 이생에서 선량하게 열심히 살면 덤으로 사후에 천국에 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면서도 무신론자인 나의 속마음은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게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나에게 그날은 더 열심히 교회 다니기를 권했다. 특히 죽어서 천국을 간다는 이유에서 교회를 다니라는 것이다. 그날은 불쑥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해버렸다. "현생에서 선하게 열심히 살면 됐지 무슨 욕심이냐? 다음 생에서 천국을 가려고 그러는 건 욕심이다."그랬더니, 당황스러운 눈빛으로"욕심이다고?"라고 하는 것이다. 못 말리는 사람, 그 사람은 바로 나다. 그 말을 하고 마음이 불편하고 좀 많이 신경이 쓰였다.


  사람이 살다 보면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하고 사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런저런 많은 경우들이 있지만 공간과 시간의 변화에 본인의 마음을 녹여서 진하게 출렁거리는 나를 차분히 다스리면서 살아야 할 때가 많다. 살다 보면 때로는 '상처'가 되어 그 어떠한 방법으로도 가라앉지 않은 경우도 왕왕 있다. 많은 시간에 기대면 그 상처가 없어질 때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도 상처는 흉터로 남곤 한다. 다양한 경험을 했을 법한 나이가 되었음에도 다른 사람의 일일 경우에는 관대하게 이해가 되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곤 하지만 정작 내 경우가 되면 그건 그리 가벼이 관대해지지 않을 경우가 많다. 아직도 멀었다. 마음의 수련이 필요하다. 아니, 어쩌면 사람이기에 내 일일 경우는 그러는 게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 친구에게 한 말이 내 본마음인데 여과 없이 불쑥 말해버려서 그 친구가 적잖게 놀라는 기색이었다. 그런지 알면서도 따뜻한 그녀의 마음에 대해 "고맙소!"라는 톡을 보내는 걸로 마음을 전하고 놀라게 한 그 부분은 언급하지 못했다. 종교는 쉽지 않다. 살면서 나는 생활의 소리는 마음 놓고 서로 나눌 수 있어도 종교에 대한 가치관은 진심으로 공감하기가 어렵다. 제대로 공감하게 되면 나도 친구 따라 교회를 다녀야 할 판이다. 그런데 그 친구는 절실한 신자다. 그렇다고 내가 그 친구 종교에 대해 언급하지 않듯이 나의 무종교에 대한 종교관도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 이대로 그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나누면서 서로의 마음을 공감해주면서 삶의 채증을 해소해주는 좋은 벗이 되어 살길 원한다. 앞으로도 쭉 서로에게 산소통 역할을 할 수 있길 바란다. 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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