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난 도시, 태어난 곳 부모님의 집으로 이사온 지 두 달 즈음 흘렀다. 12년 간 잠깐 와서 스치듯이 왔던 이곳에 다시 뿌리를 내리면서 부쩍 생각나는 분이 있다. 바로 나의 친할아버지다.
몇달 전 아직 서울에 머물던 때의 일이다. 오랜만에 본가에 와서 엄마와 가족 사진을 정리했다. 엄마는 "죽으면 모두 쓰레기가 된다"면서 한번씩 물건을 모두 버리곤 했다. 큰 앨범 서너 개에 가득 꽂힌 사진의 대부분을 정리하고 아주 극소수만 남겼다. 있는 줄도 몰랐던 갓난 아기 때의 나와 그 곁에 젊은 친할머니, 친할아버지의 사진이 가득 있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모습이 낯설었다. 돌아가시기 직전의 모습이 기억에 강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사진을 들여다 보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나를 안고 있거나, 내 곁에 앉은 할아버지 얼굴은 대부분 무표정했다.
"할아버지 표정이 왜 이래."
내가 묻자, 엄마가 퉁명스레 답했다.
"너희 할아버지는 너네 안 좋아했어. 외손자만 좋아했지."
엄마의 말이 그럴 법하다고 생각했다. 아주 어릴 때 할아버지에 얽힌 기억이란 회초리를 맞은 것이 전부였다. 손주에게 무한히 너그러운 TV 속 할아버지를 볼 때 우리 할아버지는 왜 저렇게 엄하고 무뚝뚝하기만 할까 생각했던 적도 있다. 그게 그냥 친손자가 싫어서였을까. 그럴 만한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짐작 가는 부분이 아주 없진 않다.
사람이란 모두가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 나이가 되었기 때문에 할아버지의 그런 삐뚤어진 생각도 이해할 수 있었다. 돌아가신 지 한참이 지난 분에게 서운할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그 일은 기억 속에서 잊혀져갔다.
내가 태어난 동네에 산이 있다. 일제강점기 때 저수지를 조성해 인근의 수원지 노릇을 했던 산이다. 그 시절만해도 수질 보존을 위해서 출입을 금지했던 곳. 해방 후 출입 통제가 풀리면서 동네 사람들의 쉼터이자 식수를 뜨기 위한 약수터가 되었다. 내 모교인 고등학교 뒷산과 연결되어 있어서, 전통으로 내려오던 산행의 종착지가 되었던 산이기도 하다. (덕분에 그날 나만 집에 일찍 들어갔었다.)
이만한 곳도 드물다 싶을 만큼 무성한 초록을 품은 산이다. 입구에 편백 나무 숲이 있어서 들어서는 순간 청량한 향기가 나기도 한다. 어릴 때는 그곳이 그렇게 훌륭한지 알지 못했다. 다 커서 보니 그렇게 보인다는 의미다.
그 산을 할아버지와 함께 처음 가보았다. 몇 살 즈음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등산을 가시는 할아버지를 따라 갔던 기억이 있을 뿐이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함께 계곡에서 놀다가 벌레에 크게 물린 기억도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산에 갔을 때 기분이 어땠는지는 모르겠다. 좋았는지, 가기 싫었는데 억지로 따라간 것인지. 다만 할아버지께서 등산 후 다방에 가는 것을 좋아하셨던 것 같은데, 한번쯤 따라 간 다방에서 주인이 어린 손님에게 챙겨주었을 법한 과자를 먹었던 기억이 있다. 그게 다 등산과 연결된 기억인지는 확실치 않다.
초등학생 때는 주말마다 부모님을 따라 그 산에 올랐다. 으레 등산을 시작하는 곳에서 정상을 넘어 내려가면 시락국집이 즐비한 마을이 나온다. 거기서 쌈채소에 통통한 멸치젓, 김치와 시락국과 밥이 전부인 소박한 밥상을 먹었다. 그때 비릿하면서도 짭짤한 감칠맛의 멸치젓에 싸먹는 쌈의 맛을 처음 알았던 것 같다. 그마저도 어느 순간 따라 나서지 않았다. 부모님과 함께 나들이 가지 않은 것이 언제부터였을까. 흔한 사춘기가 시작되면서부터가 아닐까 싶다.
20대에서 30대 중반까지의 나는 산보다는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산은 커녕 오르막길도 싫어했다. 그러다 어쩌다가 산에 올랐던가?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아마도 한라산 등반이 계기였던 것 같다. 스물여덟 살,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갔을 때 이모께 빌린 등산화를 신고, 아버지의 등산 스틱을 들고 설산을 올랐다. 하필 그곳인 이유라면 TV에서 성판악 코스 진달래 대피소에서 컵라면을 먹는 모습을 본 것 때문인 것 같다.
사실 그 등반은 내게 다른 의미가 있긴 했다. 쓴 패배를 맛본 직후 스스로를 믿기 위해서 혼자 어디까지 해낼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나를 낯선 곳에 혼자 몰아 넣었다. 외국은 무섭고, 국내에서 내게 가장 낯선 곳이 제주도였다. 거기서 경험한 극한이 한라산이다. (그래서 그곳에서 무엇을 느꼈나. 지금도 유효한지 모르겠지만 당시로서는 아주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 이야기는 다른 에세이에서 할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이후로도 제주도는 나를 산에 오르게 하는 곳인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습작을 위해서 제주 4.3사건의 피난지를 취재하러 중산간 지역을 걸어다녔고, 때론 낯선 마을에 낯선 오름을 오르기도 했다. 오름 위에서 바라보면 제주의 지평선과 바다의 수평선이 한눈에 들어오곤 했다. 그 경치를 좋아해서 나는 종종 오름에 올랐다.
숲의 매력을 알게 된 것도 그렇게 걷는 와중이었으리라. 푸른 하늘과 초록의 산이 어우러지는 풍경, 나무 냄새, 새 소리, 물 소리, 나무들의 앞사귀가 사락거리는 소리. 나는 그것들이 오롯히 나라는 사람에 의해 발굴되어진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득 다시 고향 마을에 오고 보니 이런 내가 할아버지에게서 비롯되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어린시절 할아버지를 따라 산에 오른 시간이 만든 혜안 혹은 감각이랄까. 맛도 먹어 본 사람이 안다는 속설과 통하는 생각이다. 우리 동네의 산의 아름다움을 알아차렸기에 모든 산의 아름다움의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일종의 추측이다.
그 추측이 틀렸다고 하더라도 나의 어떤 부분이 할아버지에 의해서 만들어졌음은 분명해보인다. 이를 테면 내가 이렇게 계층과 차별 따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된 이유가 할아버지인지도. 분명 가부장적이셨지만, 제사 때 손녀인 나와 손자인 내 동생을 나란히 세워 절을 시키던 분이셨다. 내 머릿속에 남과 여가 계층적으로 다르다는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다른 집안에는 제사 때 여자가 절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학교에 다니면서 알았다. 물론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은연 중에 머릿속에 평등 의식 같은 것이 자랐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대부분 50년대 생인 고모들이 모두 대졸인 이유 또한 할아버지의 남다른 철학 덕분이다. 할아버지는 공부를 하면 집안일을 안 시키셨다고 한다. 큰 고모는 집안 일이 싫어서 공부를 열심히 하셨고, 국립대 교대를 졸업해 평생 교직에 계셨다. 다른 고모들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직전 표정도 말도 부쩍 없어지신 상태일 때의 일이다. 집에 와 계시는데 동생이 거의 보이지 않자 물으셨다. 동생이 어디로 갔냐고. 군대 가기 전이라 휴학하고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더니 할아버지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학생이 공부를 해야지 무슨 일을 하냐."
남녀 가리지 않고 학생은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 할아버지의 지론이셨는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 지론은 고모들 그 시대에 엘리트 여성으로 만들었고, 아버지에게로도 이어졌다. 아버지는 나와 동생이 아르바이트 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셨다.
요리하는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도 많이 있다. 정확히는 내가 기억하는 가족의 맛 중에 할아버지의 맛도 있다는 의미이다. 당면을 넣은 소고기 전골과 간장에 조린 닭볶음이 대표적이다. 닭볶음은 희미하게 그 맛만 기억했는데, 얼마 전 할아버지가 해주시던 요리라는 것은 알았다. 할아버지는 평생 식당을 하시며 가족을 먹여 살리셨다. 엄마는 할아버지가 할머니보다 요리를 잘하셨던 것으로 기억하신다. 나로썬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나는 그런 할아버지를 보면서 자랐기 때문에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면 신체 부위 중 어디가 어떻게 된다는 둥하면서 부엌을 여자들만의 공간으로 만드는 문화에 선천적 반감을 갖고 있었다. 거기서 출발한 반골 기질이 나를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고집 센 성품까지도 유전자에서 온 것이라 우겨본다면 (할아버지가 고집이 세셨던 것은 확실하니까) 내가 이런 것은 할아버지 탓, 아니 덕분이다.
내가 태어나고 할아버지가 내게 가졌던 감정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직접 여쭈어보지 못하지 알 수가 없다. 확실한 것은 살가운 조부와 손녀 사이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사춘기가 지나고 학교에 다니는 동안 할아버지와는 명절이나 가족 행사가 있으면 겨우 만나는 정도였다. 아주 가까이 살았음에도 그랬다.
그럼에도 딱 한번 할아버지의 사랑을 직접 느낄 수 있었던 적이 있다. 돌아가신 후에도 오래 남아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이 나는 기억이다. 고등학생이던 나는 무슨 심부름 때문에 할아버지의 댁에 갔다. 학원이 할아버지가 사시는 곳 근처였다. 몇달 만이었는지, 몇주 만이었는지 모르겠다. 할아버지는 아주 오랜만에 만난 손녀에게 밥을 먹이고 싶으셨던 것 같다. 그래서 손수 부엌으로 가셨다.
나는 솔직히 별로 먹고 싶지 않았다. 학원 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도 했지만, 부모님 없이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있는 것이 편치 않았다. 그만큼 데면데면한 관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을 차려오셨다. 밥에 다른 반찬도 있었겠지만, 조기가 있었던 것만 선명히 기억이 난다. 당시엔 생선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먹으라고 하니까 꾸역꾸역 먹었다. 조기를 한참 발라서 먹는데, 안쪽에 익지 않은 살이 보였다. 내가 바쁘다고 하니까, 불편한 기색을 비추니까 빨리 먹이겠다고 급히 익히다 그렇게 된 것이라.
돌아가시기 직전 할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면 '쓸쓸함'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른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일본으로 돈을 벌러 가셨던 적도 있다. 그후 귀국해서 전쟁 준비에 착취당한 식민지를 터전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셨을 것이다. 그러다 전쟁을 겪었고 또다시 폐허가 된 나라에서 가족을 이루었다. 낯선 도시로 와서 자식들을 먹여 살리고 자식들을 대학까지 보냈다. 그 지난하고 성실한 인생의 말미가 그런 모습이라는 사실이 허무하고 비통한 일임을 그때 알았다면 할아버지와 나의 관계가 조금 달라질 수 있었을까.
분홍빛에 반투명한, 익지 않은 조기 살이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히 남은 이유, 그것은 할아버지께 단 한번도 사랑한다고 말씀드리지 못한 후회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