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115_철학 입문자의 NOTE(죽음을 통한 삶과 인간에 대한 규정)
삶에 대한 규정에서 죽음에 대한 규정으로 이어지는 구성의 수업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아직은 집중력의 한계치를 집필에 쓰고 있는 상황은 아니라서 복습하지 않아도 수업 내용을 정리할 수 있다. 그래서 인상적인 내용들을 하나씩 남겨보고자한다.
니체는 삶을 크게 두 가지로 보았다. ‘학문의 삶’과 ‘예술적 삶’. 학문의 삶은 곧 ‘진리에의 의지’이고 예술의 삶은 곧 ‘허구 창조 및 유희에의 의지’이다.
그는 학문의 삶, 곧 진리에의 의지가 허무주의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이는 진리를 향한 강한 믿음 때문인데, 이것이 거짓으로 판명되는 동시에 허무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이는 신을 향한 인간의 강한 믿음과도 연결된다. 영원한 진리가 어디 있겠는가. 강한 믿음일수록 배신감도 큰 법! 그런 맥락에서 이를 이해해볼 수 있다.
반면 예술적 삶. 허구 창조 및 유희에의 의지는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술가는 허구나 거짓을 유희의 대상으로, 즐거움의 대상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니체는 예술가의 어떠한 확신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가벼움과 우연을 긍정하는 태도가 찬양받아 마땅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강사께서는 예술을 소비하는 소비자의 입장에서 부연 설명하셨다. 소설을 읽을 때 몰입하면서도 그것이 허구임을 인지하는 가벼운 태도를 취하지 않냐는 것이다.
사실 창작자의 입장에서 약간의 반론은 있다. 확신에도 사로잡히지 않으려 한다는 점엔 공감하나, 그렇다고 해서 가볍다고 할 순 없으니까. 또한 우리가 쓰는 이야기의 가장 밑바닥에는 진실된 삶에 대한 규정들을 담고 있다. 소비자에게 가 닿을 수 있는 규정, 더 깊이있는 어떤 것을 찾아내기 위해서 시간을 들여 어려운 철학 공부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튼 니체가 생각하기에 예술은 변화를 추구하고, 그래서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는다고 했다. 여기서 포인트는 ‘변화’이다.
니체는 허무주의가 도래한 상황, 말하자면 모든 가치가 탈가치화된 상황에서 인간은 어떤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답으로 ‘위버멘쉬’라는 인간의 형태를 제시하고 있다. 이는 “매순간 끊임없이 자기 스스로를 긍정하고 극복할 수 있는 인간의 유형을 뜻한다.” 다시 말해 매순간 끊임없이 자기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창조하기 위해 자신이 병든 현재를, 자신의 고통 자체를 자신의 삶 자체를 긍정함으로써 극복할 줄 아는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인간이 목적이 아닌 다리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니체가 생각하기에 인간의 위대한 점이라는 것이다.
위버맨쉬를 영어로 번역하면 ‘over man’, 참으로 초월한 듯한 삶의 태도라고 생각한다. 매 순간 끊임없이 스스로를 긍정하고 극복하는 인간이라. 이렇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서 자세히 좀 공부해보려 관련 저서를 찾아보았다. 그런데 눈에 익은 제목이 나왔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대학 시절 시 교수님께서 자주 언급하셨던 책이다. 이후 부산에 한 인문학 서점에 갔다가 이 책의 책등을 보았는데, 하! 꽤 두꺼웠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엄두가 안 나지만, 시간이 여유로워지면 한번 도전해볼까.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더불어 위버멘쉬의 삶에!
*강의 인용
[죽음 : 철학적 질문들 - 7강]
(2022년 10월 24일 / 고양아람누리 문예아카데미 / 강사 : 장의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