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115_철학 입문자의 NOTE(죽음을 통한 삶과 인간에 대한 규정)
9월에 시작한 ‘죽음: 철학적 질문들’이라는 수업이 중반 정도에 다다랐다. 이제 수업은 비슷한 구성으로 진행이 된다. 그날 주제가 되는 철학자를 소개하고 그의 삶과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을 다룬다. 그것을 통해 도출해낸 죽음에 대한 철학을 다룬다. 계기는 아마도 신과 사후세계를 부정하는 철학자들의 철학으로 주제가 옮겨가면서인 것 같다. 사후세계니 영혼이니 하던 전반부의 수업이 영 흥미가 없던 나는 죽음과 삶을 같이 다루는 중반부의 수업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이것은 종교와 상극인 나의 기질과 관련이 있다.) 10월에 마감해야하는 글 때문에 집중력의 한계치까지를 다 쓰고 수업 듣다보니 알아듣지 못한 채로 넘어간 부분이 많다. 그래서 마감과 마감 사이 짬이 좀 난 요즘 온라인 다시보기를 통해서 급히 복습 중인데, 그 중 흥미로운 내용들을 정리하고 넘어가 보려 한다.
삶은 불쾌하다. 쇼펜하우어의 규정이다. 심지어 세계는 지옥이라고 했다. 그는 왜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을까? 그에 관해 강사께서는 쇼펜하우어의 삶에 대해 설명해주셨다.
쇼펜하우어는 16세 때 공장의 노예들의 모습을 보고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들의 삶이 사형선고를 받은 것보다 더욱 비참하다.” 16~17세기 노동자들의 현실이 비인간적이었다는 사실을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다. 심지어 노예이니 그 모습이 오죽 처참했을까. 살아있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나은 삶. 쇼펜하우어의 눈엔 그들이 그렇게 보였다.
11세 때 어린 시절부터 친했던 친구가 병으로 죽은 것 또한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그와 가족과의 관계인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는 우울증으로 일찍 자살하셨다. 어머니는 작가였는데 스스로 명성을 얻는 데만 치중했다고 한다. 어머니와의 관계가 일반적이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들인 쇼펜하우어와 같이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힘들다는 것을 차분하게 편지로 전하는 다소 특이한 소통방법을 갖고 있었다. 그 편지가 쇼펜하우어에게 어떤 느낌으로 다가왔을지 나로선 완전히 알기가 어렵겠지만, 침작해볼 수는 있다. 어머니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만한 순간이 있었을까? 가족관계가 원만하지 못했으니 사회에서의 인간관계 또한 순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 삶이 불쾌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쇼펜하우어에 비하면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 나름 원만한(?) 인간관계를 갖고 있음에도 나는 그의 삶에 대한 규정에 공감했다. 그는 이렇게 불쾌한 삶임에도 영생을 바라는 이들에 대해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나 역시 영생을 바라는 이들을 이해하기 어렵다.
쇼펜하우어는 삶이 불쾌한 이유가 ‘의지’ 때문이라고 했다. 여기서 의지는 우리가 흔히 쓰는 사전적 의미를 지닌 말이 아닌, 형이상학적인 개념이다. 칸트의 물자체에 상응하는 개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본체계(예지계)에 있는 어떤 것.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생의 에너지, 생명으로 향하는 맹목적인 힘이다. 이는 표상의 세계, 다시 말해 우리가 지각하고 느끼는 세계에는 없다. 표상은 우리가 만든 것이며 이는 가짜. 환영이다.
이 의지는 욕망으로 발현된다. 우리가 무언가를 욕망한다는 것은 곧 결핍을 갖고 있다는 의미이다. 문제는 이것이 의지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의지는 맹목적인 생의 에너지이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있는 한 욕망을 멈추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늘 결핍되어 있다!
참된 만족, 평안이라는 것이 없다. 만족 자체가 또 다른 욕망을 품고 있다. 만족은 과도기이다. 결국 또 다른 욕망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다. 욕망하는 한 우리는 결핍된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늘 결핍되어 있는 삶이 유쾌할리가! 삶이 불쾌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여기까지 설명을 들었을 때 어렴풋이 내가 쇼펜하우어의 삶과 세계에 대한 규정을 공감하는 이유를 알아차렸다. 나는 늘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것을 바란다. 태생적으로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고 긍정하지 못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늘 무언가를 욕망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쇼펜하우어는 세계가 지옥인 이유도 설명한다.
모두가 욕망한다면, 서로 욕망이 부딪쳐 세계는 끊임없는 갈등하는 사람들로 가득해진다. 이런 상황에서 세계는 더 나은 방향으로 갈 수가 있는가? 쇼펜하우어는 이 방면에서 부정적이다. 그의 결론 이것이다. 세계는 나아질 수 없다. 그러므로 세계는... 지옥이다!
쇼펜하우어는 이 세계에 자유도 없다고 말한다. 인간은 자신이 뭘하는 지도 모르는 채 의지가 명령한 대로 욕망한다. 인간은 이를 바꿀 수 없다. 사실 나는 내가 뭘 욕망하는지 대부분 알기 때문에 이 부분은 동의하기가 어렵다. 아무튼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세계로부터 해방되는 길이 죽음이라고 한다. 결국 그에게 죽음은 좋은 것이다!
죽지 않고 자유로워지는 길은 없을까? (참고로 쇼펜하우어는 자살은 나쁜 것이라고 했다.) 쇼펜하우어는 그 길을 제시하고 있다. 의지를 부정하는 것. 표상의 세계(현상계)에 의지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토대로 하고 있다. 의지를 부정한다면, 표상의 세계를 뒷받침하고 있는 의지도 사라진다. 이는 곧 무(無 = 죽음)의 경험을 낳게 될 것이다.
방법은 크게 세 가지다.
첫 번째 연민, 타인의 고통에 예민해지는 것. 이 사람의 고통이 내 고통인양 상상하라고 한다. 타인의 고통과 나의 고통을 구분하지 않는 상태. 표상 세계의 주객 분열 상태가 사라진다. 이로 인해 의지의 부정에 준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이것이 의지, 욕망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생각해봤다. 결국 나의 욕망에 갇히지 않고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일이기 때문에 의지, 욕망하는 삶의 중단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두 번째가 종교적 금욕이다. 불교의 금욕실천. 욕망을 억제하는 가운데 의지의 부정에 도달할 수 있다. 이는 의지와 욕망의 관계를 이해했다면 부연 설명이 필요하지 않으리라 본다.
세 번째가 미적 경험. 아름다운 것을 경험할 때 미적 관조를 행하게 되는데, 미적을 바라보는 ‘어떤 태도’와 ‘상황’에 의해서 의지를 중단시킬 수 있다. 이 설명이 매우 모호한데, 복습하다가 궁금해서 온라인 게시판에 남겨 답변들을 들었다. 아주 긴 설명이었으나 요약하면 미적 관조를 통해 예술 작품에 몰입되어, 관조하는 주체와 대상이 되는 작품 간의 구분이 사라지는데, 이를 통해서 주체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의지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는 어떤 것에 완전히 몰입하다 보면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잊은 상태가 되는 경험을 해본 사람이 있다면, 쉽게 이해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어서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이러한 경험은 특별한 재능을 전제로 한다. 대다수의 삶은 뛰어난 예술작품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나에게 특별한 재능이 있어서 그런 몰입감을 경험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유로운 사고만 있다면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재능을 사람들이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을 뿐 실현시키니 못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세 가지 방법의 치명적인 한계도 존재한다. 영원할 수 없다는 점. 이는 일시적으로 자유로운 상태에 불과하다. 결국 죽는 길뿐인가! 참으로 슬픈 결론이다.
*강의 인용
[죽음 : 철학적 질문들 - 5강]
(2022년 10월 24일 / 고양아람누리 문예아카데미 / 강사 : 장의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