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207_철학 입문자의 NOTE
“인간은 모두가 문명화되면 될수록 배우가 된다.”(<실용적 관점에서의 인간학>, 임마누엘 칸트, 아카넷 p155)
여기서 배우가 된다는 것은 쉽게 이해하듯, 스스로를 꾸민다는 의미이다. 그 다음을 계속 읽어보자.
“인간은 호의와 타인에 대한 존경과 정숙 그리고 사욕 없음의 가상(겉모습)을 취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로써 누군가를 속이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타인 누구라도 진심으로 그것이 뜻하는 것이 아님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같은 책 p155~156)
진짜를 감추는 대신에 우리가 뒤집어 쓴 가면은 타인에 대한 존경과 정숙, 사욕없음과 같은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다. 칸트는 이것을 기만이라고 하지 않는다. 타인들이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어쩌면 누구나 그러고 있을 테니까. 칸트의 이 저서에서 자기를 꾸미는 이 행동을 ‘예의’라고 말하며 긍정적인 것으로 이야기한다.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다. 예의없는 것보다는 예의 있는 것이 좋으니까. 그러나 한편으론 이런 행위가 기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최소한 타인에 대한 존경심 만큼은 진심인 것이 예의가 아닌가?
칸트뿐 아니라 다른 철학자들도 현실에서 보여지는 인간의 모습이 그의 본질과 상이하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중 최근에 배운 흥미로운 이론들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현존재(Dasein)는 자신의 존재 가능성에 대해서 이해하면서 이 존재와 관계하는 존재자들이다. 현존재 안에는 두 개의 가능성이 존재하는데, 본래적 가능성과 비본래적 가능성이다. 그 중 비본래적 가능성을 ‘타인’과의 관계를 놓고 이해해 볼 수 있다.
여기서 타인은 특정 누군가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이 사람도 저 사람도 아니고, 또 사람들 자신도 아니고, 몇몇 사람들도 아니고, 모든 사람의 총계도 아니다.”(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그는 바로 중성명사인 “세인”이다. 세인은 “어떤 특정한 사람이 아니다. 세인은 총계라는 의미에서는 아니지만, 모두이다. 이러한 세인이 일상성의 존재 양식을 지정해주고 있다.”(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나는 세인에 대해 이렇게 이해했다. 특정 누군가는 아니지만 나의 행동 양식, 사고의 양식 같은 것들을 지정해주는 보이지 않는 누군가. 이것은 규범일 수도 있고, 고정관념일 수도 있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 평균성은 세인의 실존적 성격이 하나이다. (...) 그렇기 때문에 세인은 당연한 것, 사람들이 타당하게 여기는 것과 그렇지 않게 여기는 것, 사람들이 성공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과 성공한 것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것 등과 같은 것의 평균 속에서 현사실적으로 머물고 있다. 감행될 수 있는 것과 감행되어도 좋은 것을 앞서 윤곽짓는 이러한 평균성이 중뿔난 모든 예외를 감시한다. 모든 우위를 소리 없이 억압한다.”(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하이데거는 우리가 이 세인의 영향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행하는 방식의 대부분이 타인(세인)을 위한 활동이거나 타인들과 관계하는 활동들이라는 의미이고 하다. 그래서 우리는 본래적인 존재로서는 살아가지 못한다. 본래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으로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하이데거의 현존재 개념은 결국 세계-내-존재, 세계 안에서 실존 안에서의 존재이다. 이는 세계가 내가 어떻게 나 자신과 관계하는지를 이해하며, 또 내가 어떻게 다른 존재와 유의미하게 관계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비본래적인 존재라면 이해한다기 보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모방하는 것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본래적인 존재라면 이해함으로서 자신의 세계관을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는 모두 본래적 존재로서의 가능성과 비본래적 존재로서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본래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사실 하이데거의 이론을 따르자면 나는 본래적 존재로 살기 위해서 거의 평생을 고심해온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실제로 세인이 만든 평균에 늘 의문을 품어왔고, 격렬히 거부해왔다. 그렇게 살아 30대 후반이 된 지금 결국 나는 또다시 본래적 나에 대해 고민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본래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스스로 잡은 ‘글’을 통해서도 나는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을 쓰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자각이 30대 후반의 시간을 지배해 온 것이다. 어찌보면 참으로 허무한 투쟁의 결말이다.
레비나스가 주장하는 타자와의 관계에서 가면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타인의 얼굴’이라는 개념이다. 타인의 얼굴은 ‘무한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 무한을 뜻하는 그리스어 apeiron은 ‘결정되지 않은’, ‘규정되지 않은’, ‘정해지지 않은’등을 뜻하는 ‘apeorus’의 중성명사이다. 말하자면 규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규정되어 있지 않다면 인식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의문이 생긴다. 얼굴인데... 인식할 수 없다니!
레비나스의 얼굴 개념을 더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서 강사께서는 그의 ‘애무’에 대한 주장을 인용하셨다.
“애무는 주체가 타자와의 접촉 속에서 이 접촉의 피안으로 가는 주체의 존재 방식이다. 애무는 피하는 어떤 것과의 놀이, 그리고 기획이나 계획이 절대적으로 없는 놀이, 우리의 것이 그리고 우리가 될 수 있는 것과의 놀이가 아니라, 언제나 다른, 언제나 접근 불가능한, 언제나 오고 있는 다른 어떤 것과의 놀이와도 같다.”(levinas, La temps et l’autre, p82)
사랑하는 이를 손으로 만질 수는 있지만, 언제나 나와 다르고, 그래서 접근 불가능하다. 언제나 다가오고 있을 뿐, 이미 다가온 존재는 아니다. 진정한 ‘얼굴’을 인식하고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결코 타자와는 우리가 될 수 없다.
레비나스의 얼굴의 개념은 다 안다고 믿었던 타자가 종종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내가 궁극적으로 타자를 믿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보여준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가? 논술 강사이면서 동시에 드라마와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다. 어디서 만난 누군가에겐 작가라고 불리는 나는 실제로 어떤 작품도 세상에 내어본 적이 없어서 스스로 작가 지망생이라고 소개한다. 긴 설명이 귀찮을 때는 그저 논술 강사 일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소개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든다. 나를 규정하는 이 모든 것을 말한다고 한들, 내가 살아온 시간과 그 시간 동안 쌓인 ‘나’라는 주체를 설명할 수 있을까? 대자적 존재로서의 나는 일부를 감춘 채로 드러내보이는 나의 일부인지도 모른다. 특별히 훌륭해 보이고 싶어서는 아니다. 다 설명하기가 귀찮아서 나를 감추고 누구나 이해할만한 가장 보편적인 단면만을 보여준다.
나의 모든 것을 보여도 좋을 만큼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나는 그를 완전히 믿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만약에 그렇다면 인생을 걸어 평생 타인과 가족이 되는 상상도 해볼만하다. 그러나 수많은 철학자들이 규정하듯 그야말로 불가능에 가까운 이변이다.
누구나 가면을 쓴다.
자각을 했든 하지 못했든,
우리는 진짜 얼굴을 감추고 살아간다.
*강의 인용
[죽음 : 철학적 질문들 - 8강, 11강]
(2022년 11월14일, 12월 5일 / 고양아람누리 문예아카데미 / 강사 : 장의준)
[철학 명저 제대로 읽기 : 칸트<실용적 관점에서의 인간학>]
(2022.9~12 / 고양 아람누리 문예아카데미 / 강사 : 이현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