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9참사를 기억하는 법_221214
지난 11월 22일 '10.29 이태원 참사' 유족들의 첫 기자회견이 있었다. 생중계는 아니었지만 그즈음 녹화된 풀영상으로 보았다. 그들은 희생자의 이름을 부르며, 생전에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어쩌다 그곳에 있었는지, 그들을 잃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등을 말했다. 어떤 분들은 희생된 가족의 사진을 들고 있기도 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묻고 있었다. 왜 자신들의 가족이 그곳에서 희생되어야만 했는지, 그 시간 국민의 안전을 지킬 의무를 가진 정부는 어떻게 작동되고 있었는지. 그리고 촉구한다. 조사해달라고, 알아야만 하겠다고!
그날 나왔던 발언 중에서 시간이 갈수록 의미를 더하는 묵직한 질문이 있다. 희생자 이민아씨의 아버지께서 하셨던 질문이다. 기자 회견하기 얼마 전 수소문 끝에 겨우 유가족을 만나 아무런 지원 없이 비밀 작전하듯 만나셨다면서 이렇게 물었다.
첫 기자회견에서 나왔던 발언 중에는 2차 가해에 대한 것도 있었다. 명단 공개가 2차 가해라는 논란이 있던 즈음이었다. 한 유족께서는 위폐와 영정이 없는 분향소가 자신에게 2차 가해였다면서, 그런 분향소를 본적이 있느냐 통곡했다.
기자회견으로부터 2주 가량 지난 지금 정부와 여당의 2차 가해의 수준이 도를 넘고 있다. 명단을 공개했던 것은 절차의 하자를 지적할 수 있으나, 순수한 애도를 위한 선의였다. 지금의 2차 가해는 그 저의마저 불순하다. (재언급하는 것이 또다른 가해를 낳을지 몰라서, 더불어 차마 입에 담고 싶지 않은 ‘더러운 말’들이라서 다 쓰진 않겠다. 혹시나 어떤 발언인지 모른다면 정리된 기사를 링크할 테니 참고하길 바란다.) 심지어 여당의 모 유력 국회의원은 세월호까지 소환하며 정쟁으로 소비되다가 시민단체의 횡령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말까지 했다!
횡령이라니! 유족들은 시종일관 돈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이쯤 되면 그런 말을 입에 담아 유족을 능멸하는 여당 쪽 국회의원들이나 정부 인사들의 귀가 먹었거나 뇌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든다. 한국말로 말하고 있는데 같은 모국어를 쓰고 있음에도 왜 알아듣는 것인가, 아니면 기억하는데 치명적 문제가 있는 것인가.
하지만 상식적으로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문득 떠오르는 무학대사의 명언.
돼지의 눈에는 모두 돼지로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모두가 부처님으로 보이는 법입니다.
스스로의 인격을 본인의 입으로 증명하고 있는 참으로 난감한 상황인 건가?!
2021년 DMZ국제다큐영화제에서 <세월>이라는 다큐가 상영되었다. 이 작품은 세월호와 더불어 지난 시간 동안 우리 사회에서 일어났던 사회적 참사와 그 유족들이 이야기를 다루었다. 놀라운 점은 그때도 유족들은 싸워야 했다.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서든,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건. 그들은 어느 순간 사회에서 고립되고 외로이 투쟁했다. 참사는 유족들의 삶을 바꾸었다.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일을 하게 하든, 몸과 마음에 치유할 수 없는 상처가 남게 되든.
특히나 대구 지하철 방화사건의 사례가 기억에 남는다. 어린 시절에 뉴스로 접한 사건임에도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자세히 몰랐던 지점들이 유족이 시점으로 상세히 전해졌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종이로 된 지하철 탑승권을 쓰던 시절이라서 귀가하지 않은 자신의 자녀가 지하철에 탔는지, 그렇지 않은지 확인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그런데 대구 시장은 군부대를 동원해서 내부를 물청소하여 현장을 보존하지 않았다. 유족들은 스스로 현장을 보존하고, 희생자의 흔적을 찾아야만 했다. 다큐에 나왔던 유족은 당시 그을음이 남아 있던 역내에서 농성을 한 후유증으로 지금도 호흡기에 질병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참사에 대한 축소 은혜의 시도가 대구 지하철 방화사건과 세월호, 그리고 1029참사로 연결되고 있다는 부분이다.
“인간은 그 자신의 밀실에서만 살 수 없어요. 그는 광장과 이어져있어요. 정치는 인간의 광장 가운데서두 제일 거친 곳이 아닌가요? (중략) 한국 정치의 광장에는 똥 오줌에 쓰레기만 더미로 쌓였어요. 모두의 것이어야 할 꽃을 꺾어다 저희 집 꽃병에 꽂구, 분수 꼭지를 뽑아다 저희집 변소에 차려 놓구, 페이브먼트를 파 날라다가는 저희 집 부엌 바닥을 깔구, 한국의 정치가들이 정치의 광장에 나올 땐 자루와 도끼와 삽을 들고 눈에는 마스크를 가리고 도둑질하러 나오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착한 길 가던 사람이 말릴라치면 멀리서 망을 보던 깽이 광장에서 빠지는 골목에서 불쑥 튀어나오면서 한칼에 그를 해치는 거예요. 그러면 그는 도둑놈한테서 몫을 타는 것이지요. (중략) 그는 밀실에만은 한 떨기 백합이기를 원합니다. 그는 마지막 숨을 구멍이기 때문이지요. 저희들에겐 좋은 아버지였어요. 국고금을 덜컥한 정치인을 아버지로 가진 인텔리 따님의 말이 풍기는 수수께끼는 여기 있는 겁니다. 오, 좋은 아버지, 인민의 나쁜 심부름꾼, 개인만 있고 국민은 없습니다. 밀실만 푸짐하고 광장은 죽었습니다. (중략) 좋은 아버지, 불란서로 유학 보내준 좋은 아버지. 깨끗한 교사를 목 자르는 나쁜 장학관, 그게 같은 인물이라는 역설. 아무도 광장에서 머물지 않아요, 필요한 약탈과 사기만 끝나면 광장은 텅빕니다. 광장이 죽은 곳. 이게 남한이 아닙니까? 광장은 비어 있습니다.”
최인훈의 <광장>의 한 구절이다. 소설의 주인공 이명준은 해방기 한국 사회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어쩌면 그 시대를 살았을 작가 최인훈의 시선인지도 모른다. 광장, ‘사회적 공간’에서는 부패하고 나쁜 한 사람이 밀실, 가정과 같은 ‘개인적 공간’에 가면 좋은 사람으로 변하는 역설.
입에 담기도 뭣한 저 막말을 정치인들, 책임자임에도 거짓과 회피의 태도로 일관하는 행안부의 이상민 장관. 그들을 바라보는데 이 소설의 이 구절이 떠올란다. 그들 또한 집에서 자식을 키우는 부모라는 사실 때문이다. 그들이 밀실에서 자식들에게 관대하고 좋은 부모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섬뜩하다. 그들은 이태원 참사 희생자를 폄하하고 유족을 능멸하며 우리 사회의 건전하고 깨끗한 광장을 ‘살해’하고 있다.
2차 가해가 정치인에게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소설 <광장> 속 1940년대 대한민국의 광장에 대한 통찰은 20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너무나 유효하다. 그러나 이렇게 인정하고 말 것인가? 그렇지 않음을, 우리가 진보하고 있음을 시민 각자가 증명해야 할 때가 아닌가?
<참고> 기사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