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9참사를 기억하는 법 _ 22.12.20
2022년 12월 16일. 저녁 즈음 녹사평 지하철역 3번 출구에서 걸어 나왔다. 인도 주변으로 꽁꽁언 눈들이 남아 있었고, 도로 갓길에 경찰 버스가 세워져 있었다. 경찰들은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었다. 희생자의 49재 날이라 추모제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참석하려 했으나, 토요일날 강의하는 학원의 보강이 그날 저녁 비대면으로 잡히는 바람에 포기했었다. 그래도 철거되기 전에 분향소는 꼭 방문하고 싶어서 오전에 다음날 수업 준비를 마치고 보강이 몇시간 남은 시각에 녹사평역으로 향했다.
광범위하게 벌어지는 2차 가해, 맥락 없이 ‘돈 돈’ 거리는 여당 정치인을, 아예 없었던 일인양 치부하려는 정부의 태도. 사회가 이태원 참사를 매도하고 지우려 하는 것 같았다. 세월호 사건 때처럼 이태원 참사의 유족들 우리 사회에서 고립될까 걱정이 되었다. 그런 모습을 또다시 눈으로 볼 자신이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때 기회를 놓쳐 하지 못하는 바람에 결국엔 후회하게 될 나 스스로에 대한 걱정 또한 있었다. 그래서 짬을 내 가게 된 것이다.
역 앞에 줄지어 있는 경찰 버스에 세월호 집회의 기억이 떠올랐다. 소위 차벽이라고 불렀던 것에 이용되었던 경찰 버스다. 집회 주변으로 그것을 세우기 위해서 무리하게 이동하다가 시민이 다치는 사고를 본 적이 있다. 경미한 사고였으나, 감정은 좋지 않았다. 무언가 감추어야만 한다는 강박의 결과처럼 느껴졌으니까.
그러나 이번엔 그런 이유로 경찰이 동원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분향소에 더민주 이재명 대표가 참배 중이었기 때문에 인원 통제를 위한 것이었고, 더불어 추모제 때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서 경찰들을 배치하려는 것이었다. 경찰 또한 분향소로 향할거란 막연한 추측으로 그들의 뒤를 따랐다. 얼마 안 가 길건너 흰 천막이 보였다.
분향소는 이재명 대표의 참배를 찍기 위한 기자진들, 그곳의 상황을 생중계 중인 유튜버들 때문에 분향소는 혼잡했다. 분향소를 눈 앞에 두고도 경찰이 가라고 하는 방향을 따라 주변을 삥 둘러 걸어가니 이태원 참사 진상조사를 지지하는 서명을 받는 테이블 앞에 서게 되었다. 서명을 하고 보니 추모객이 선 줄의 끝이 보였다.
그 줄의 맨 끝에 서서 건네주는 국화를 받아 쥐고, 사람들의 등만이 촘촘하게 보이는 곳에 서있다 보니, 한쪽에 커다란 현수막이 보였다. 극우 시민 단체가 걸어 놓은 것 같은 현수막이었다. 분향소는 참배하려는 사람과 취재하려는 사람, 어깃장을 놓고 싶은 사람의 욕망으로 뒤섞여 혼잡했다. 마치 이태원 참사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각이 뒤섞여 한 데 모여 있는 것 같았다.
이재명 대표가 참배를 하고 이동하자, 기자도 유튜버도 함께 사라져 드디어 영정들을 볼 수 있었다. 젊디 젊은 얼굴들이었다. 이렇게 가기엔 너무나 아까운 대부분이 청춘, 누가 보든 그런 생각이 앞설 해사한 얼굴들이다. 이제서야 왜 정부가 그들의 영정을 놓지 못하게 하였는지 알 것 같았다. 감정이 요동쳤다. 국화를 놓고도 차마 돌아서서 가지 못할 만큼. 멍하니 그 얼굴들을 눈에 담았다.
추모제가 곧 시작되니 참여해달라는 안내방송이 들렸다. 시계를 보니 보강 시간이 몇 시간쯤 남은 상황이었다. 여섯 시부터 시작된다니 한 시간 정도 참여해도 보강시간을 넉넉히 남겨 집에 도착할 것 같았다. 이번엔 이동하는 사람들을 따라 걸었다. 집회 장소도 어디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우리를 기억해 주세요”
멀리 큰 화면에 쓰인 문구가 보이고 그 앞에 사람들이 보였다. 기자들도 함께 있는 듯했다. 중간에 빠져나와야 하니 시위대의 중심 쪽이 아닌 가장자리 보도블록 위에 서서 추모제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종교인들이 희생된 이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했고, 유족협의회 대표께서 인사 말씀도 했다.
“유족협의회 대표 지한이 아빠...”
누군가의 아빠라는 평범한 명칭이 비장한 투사의 이름처럼 들렸다. 이것이 참사 이후 유족의 삶이구나 새삼 깨달았다. 그러나 납득할 수는 없었다. 어째서 그래야 하는가? 질문이 앞섰다. 왜 그들이 싸워야 하는가? 그들의 슬픔을 사회가 충분이 감싸주었다면 그들이 투사가 될 이유가 있는가?
16일날 이태원에 가게 된 이유 중엔 참사 때 친구를 잃고 혼자 살아남은 10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뉴스 때문도 있었다. 오늘 한준호 의원의 SNS에 올라왔다는 이태원 참사 유족의 자살 시도 사례 또한 같은 이유로 뼈아프게 다가온다.
최근 들었던 철학 수업에서 프로이트의 애도 이론에 대해서 배웠다. 프로이트는 실패한 애도와 성공한 애도를 나눈다. 그 기준은 상실한 대상과 자신을 동일시하느나, 분리하느냐의 차이이다. 동일시한 경우는 실패한 애도이다. 실패한 애도의 결말은 자기 비판, 자기 비난이다.
이후 이론에 대한 여러 가지 반론이 나왔다. 그러나 적어도 이 부분은 가치 있는 규정이라 생각했다, 애도 끝에 이렇게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이 이러한 자기 비판과 비난의 상태에 빠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당장 유족이 아닌 나 스스로도 그렇다. 이런 일이 벌어졌음에도 궁극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사실에 자괴감이 든다. 그것이 결국 애도 끝에 우리가 경험하는 우울이다.
애초에 기한을 정해놓고 애도를 하라는 정부의 결정 자체가 비인간적이었다. 자신의 가족이, 자식이 그렇게 목숨을 잃었다고 생각해보라. 일주일간 애도하고 말끔히 청산이 되는지. 그럼에도 사회는 기간을 정해 애도를 강제했고, 이제는 그 죽음을 매도하고 외면하고 있다. 우리는 유가족, 생존자들이 건강한 애도를 할 수 있게 함께 해야 한다. 이것이 어쩌면 참사를 경험한 사회 일원으로서 우리 스스로가 건강한 애도를 할 수 있는, 모두가 더 나은 삶으로 가는 길이다.
종교인들의 기도와 유족협의회 대표님의 인사가 끝난 후, 희생당하신 분들의 사진과 이름을 부르는 순서가 있었다. 한 명 한 명 이름을 부르며 사회자는 “기억하겠습니다.” 라 말했다. 나는 그 이름이 모두 호명되고 추도사가 시작된 7시 즈음 자리를 떴다.
기억해달라는 호소가 이처럼 절절해야 할 이유가 또 무엇인가, 이 역시 나는 이해하기 어렵다.
참사의 희생자를 사회가 기억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기억할 것이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