툭. 투둑! 비가 와.

정혜윤 <슬픈 세상의 기쁜 말>

by 평온
아침에 눈을 뜨는
나의 의무 사항 중 하나는
하루의 슬픔을 감당할
기쁨을 찾는 것이다.
- 정혜윤 <슬픈 세상의 기쁜 말> 중


내가 찾은 기쁨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첫 손님으로 내가 좋아하는 카페에 들어가

2층 구석진 자리를 독차지하고

애정하는 작가의 책을 펼치고

그 세상에 퐁당 빠졌다가

벅차 오르는, 혹은 아파오는 마음에

눈을 들면

창 너머 파랗고 눈시린 바다와

하얗고 부신 구름 바라 보기.


그보다 더 좋은 건

창문을 때리며 '툭. 투둑'

반가이 내려주는 비.

카페에 앉아

오시는 비님까지 바라볼 수 있다면

이제 오실까 저제 오실까,

기다리던 임을 만난 황진이처럼

버선발로 뛰쳐 나갈 수도 있을 것 같다.


친구 주책이 동영상을 보내왔다.

엄청나게 비가 쏟아지고 있다.
- 광령은 난리인데 거긴 어때?


거기다 대고 나는 엉뚱한 답을 한다.
- 사무실 문 닫을까?

일신상의 이유로 오늘 일 접는다고.


비 내리는 펜션 (주책의 새 사업) 마당에

천막도 쳐 있겠다,

거기 앉아 막걸이에 파전을 먹으며

비만 바라보고 싶다.


- 고추 따러 왔다가 비만 맞고 가지요.
서로 딴 얘기만 주고 받는,

비 오는 어느 오후.


나는 비를 좋아한다.

전혀 비 내리지 않는 걸 0으로 하고,

산사태가 나고 홍수가 날 정도의 비를

10으로 한다면,

나는 비 내리기 직전 0.9부터 벌써 신이 난다.

강도 5~7 정도의 비면 딱 좋겠다.

툭 투둑! 비가 오는 소리에

내 마음도

탁.

탁.

탁.

내가 사는 이 땅에 스며드는 기분이다. 나도밤나무, 너도밤나무라는 이름들처럼 <나도빗방울>로 내 이름을 바꿔볼까?

빗방울이 된 마음이 흘러

10살 무렵의 풍경을 그려낸다.

비가 많이 내려야

집 짓는 일은 하루 쉴 수 있다.

비는 나에게 엄마, 아빠, 온 가족이

한낮에도 집에 모여 있는,

고마운 날을 선물했다.


다섯 남매와 부모님,

그리고 아빠가 데리고 있던

서너 명의 목수 삼촌들까지

마루에 모여앉아 잔치를 벌이던 풍경이

내 비 사랑의 최대 이유를 차지한다.


지금 창 밖에,

그 날의 마루,

왁자지껄 웃고 떠들던 소리를

떠 올리게 하는 비가 오고 있다.

반갑고 고마워~~

7~8 정도의 비라면 더 반갑다.

땅바닥을 쓰다듬는 정도의 비 말고,

타닥타닥 대지를 때리는 비.

하늘에서 땅까지 빗금이 그어지고,

흙바닥이 타다닥 튀는 그런 비.


그런 날은 해안도로로 차를 몰고 가

비를 온 몸으로 맞이하는

바다를

바라보기만 해도 좋다.

차가 씻기고, 나무가 씻기고,

결국

나마저 씻기는,

세상 대청소의 날.


3 정도의 비라면

초록에 어울리는,

빠알간 혹은 노오란 색의

우산을 쓰고

숲으로 가자.


맑은 날에는 느낄 수 없던

강한 숲향이

몸 전체로 스며든다.

중독성이 있다.

보슬보슬 비 내리면

벌써 그 숲과 향이 나를 부르는 듯

달려가고 싶어진다.


오감을 모두 충족하는

뿌듯함과 충만함을 느끼고 싶다면

비 내리는 숲으로 가자.


나무들이 물안개에

살짝살짝 몸을 가리고,

연못가 연잎들 사이로

무늬를 그려내는 빗방울들이

모두 말을 거는 듯한

신비한 세상 속으로

입장할 시간이다.

남편 이름은

‘때 맞춰 내리는 비’라는 뜻을 품고 있다.

흠~ 단비라는 말이군.

이름은 참 좋네.

비를 좋아하는 나에게 다가온,

우연인 듯 필연인 듯..

더 이상 좋은 말은 안 나올 것 같아 그만.


최악의 가뭄이라는 강릉에

이번 주말에 비가 내린다는 소식이 있다.

단비가 내려주었으면 좋겠다.

202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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