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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모 Jun 05. 2024

사촌

8살 나의 일기

1997년 8월 27일 수요일

일어난 시각: 7시 30분

잠자는 시각: 9시 30분


사촌 재혁이 오빠와 남경이랑 은선이 은경이랑 우리집에 놀러 왔다.

우리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했고 술래잡기도 하고 오락도 하고 소꿉놀이도 하고 많은 놀이를 했다.

재혁이 오빠가 자기만 못 놀게 한다고 투덜 댔다.

그래서 사촌들이 모두 집에 갔다.


담임 선생님 코멘트: 민정이는 방학동안에 더 예뻐졌구나 2학기에도 열심히 노력하자 



어른이 된 나의 소회

외가 사촌들은 두 파(?)로 나뉜다. 2000년대 이후 출생파와 오늘 일기에 등장하는 80-90년대생들.

늦둥이 우리 동생을 포함한 2000년대생 아기 사촌들은 그들이 기저귀 차던 시절부터 기억이 난다. 이제는 군대도 다녀온 아저씨가 됐지만 내게는 아직도 아가들 같아서 뭘 해도 기특하고 뭘 해도 고맙고 마냥 예쁘다.


또래 사촌들은 약간 결이 다르다. 이들은 나와 동시대의 어린 시절을 보내고 같이 소꿉놀이를 하고 말다툼을 하고 서로 질투하면서 함께 성장했다. 그래선지 어른들간의 사정으로 십 몇 년을 못 보다가 할아버지 장례식장에서 만난 또래 사촌들을 본 기분은 참으로 미묘했다. 잊고 살던 어린 시절이 다시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오늘 일기의 거의 주인공 격인 재혁이 오빠는 나보다 두 학년이 높았으니 초등학교 3학년이었을 것이다. 당시 사촌들 사이에서 유일한 남자이자 최고 오빠였으니 여동생들을 이끌고 놀이를 주도하고 싶었을 듯하다. 하지만 만만한 여동생들이 아니었다. 소꿉놀이를 하며 오빠에게 아기 역할을 억지로 맡긴다든지 술래잡기를 할 땐 우리끼리 짜고 오빠만 술래를 하도록 따돌렸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초등학교 3학년짜리 오빠는 '자기만 못 놀게 한다고 투덜댔'고 아이들끼리 다투고 이르는 이 소리를 계기로 어른들은 "아유 이제 집에 가야겠다!"며 일어섰을 것이다. 그리고 신나게 놀던 나는 사촌들이 집에 간다는 소식이 너무 서운한 나머지 그림에 나오는 것처럼 풀죽은 표정을 지었으리라.


그렇게 기억 속에 투덜대는 어린 오빠로만 남아있던 재혁이 오빠는 키도 나이도 훌쩍 큰 어른이 되어서 다시 만났다. 장례식장 손님들을 다 보내고 가족들끼리 명절 마지막 날같은 술자리를 갖던 중 오빠는 살짝 술이 들어간 채로 우리의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말했다. 

"어릴 때 외할머니네 집 마당에서 물놀이를 한다고 대야에 물을 받았는데 다른 애들은 신나서 물에 들어갔거든. 근데 너는 마당 한켠에서 물에 안 들어갈 거라고 입을 삐죽거리고 있었어." 

술 들어간 오빠가 계속 몇 번이고 넌 어릴 때 자주 그랬어, 라고 반복해서 좀 민망했다. 그치만 어른이 되면서 쓴 사회적 가면 이면의 나의 내성적이고 예민한 본모습을 기억하는 오빠가 고맙고 신기했다. 오빠는 그 어린 시절에도 나름의 사랑어린 눈으로 동생들을 관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언니나 오빠가 없는 내게는 어린 시절의 나를 이렇게 세세히 기억해주는 오빠의 시선이 사랑으로 느껴졌다. 밤을 새워 오빠와 지난 살아온 날들과 기억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그 시간이 내게는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밤이었다.


서로 너무 상황이 달라졌고 이젠 연락처도 모르는 사촌지간이지만 경조사로 언제 만나도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묶인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다. 



글모 선생님의 코멘트

오빠가 잘 놀다가 왜 투덜댔을까?

사촌들과 다음에 만나서 또 놀 날이 기다려지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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