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살 나의 일기
1997년 8월 24일 일요일
날씨: 해 쨍쨍(무더위?)
일어난 시각: 7시
잠자는 시각: 9시
일요일 아침 아빠랑 나는 수락산에 갔다.
처음에 올라 갈때는 상쾌하고 기분이 좋았지만 한참 가다보니까 다리도 아프고 짜증이 났다. 아빠한테 내려가자고 말했지만 아빠는 막무가내 였다.
이제 거의 다올라 왔다고 아빠가 말했다. 내려갈때는 올라가는것보다 재미있있었다.
어른이 된 나의 소회
우리 아빠는 그 유명한 58년 개띠다. 베이비붐 세대로 한창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성장하던 시기에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개천에서 용난 케이스로 서울의 회사에 취직해 정년까지 30년 넘게 한 회사에서 일하셨다. 그 수고와 업적에 대해 칭찬 한마디할라 치면 아빠는 '무능해서 눈에 띄지도 않고 잘리지도 않고 다닌 것'이라는 식으로 자조 섞인 말을 하신다. 겸손의 표현이겠지만 이 말은 아빠의 사회생활이 어땠을지 상상하게 한다. 가끔은 내 마음에 울려퍼져 눈물이 핑글 돌게 만든다.
그 시절엔 '놀토'같은 개념조차 없이 주6일 당연하게 일하던 시기였으니 일요일이 얼마나 소중했을까 싶다. 그 일요일마다 아빠는 늘 산에 올랐다. 그리고 나를 꼭 데려갔다. 내 기억에 유치원생 때부터 아빠와 함께 산을 올랐던 기억이 있다.
일기에도 나와있지만 나는 산을 오르는 것 자체를 그리 좋아하진 않았다. 내려가는 길은 신나서 뛰어 내려갔지만, 다리와 허리의 힘을 사용해 한 발 한 발 올라가야 하는 것이 어린 아이로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매주 아빠와 등산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아빠의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주로 집에서 봤던 아빠는 소파에 앉아서 런닝 차림으로 뉴스를 보던 모습, 말도 없고 무뚝뚝한 모습, 미간이 찌푸려져있던 모습이었는데, 산에만 가면 아빠는 달라졌다. 아빠는 크고 따뜻한 손으로 내 손을 잡았고 요즘 읽는 책 얘기를 해주었고 가끔씩은 혼자 나무 뒤에 숨는 장난도 쳤다. 집에서는 금기시되어 있던 죽은 삼촌과 동생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며 속마음을 드러낼 때도 있었다. 내리막길에서는 보온병에 가져온 뜨거운 물을 컵라면에 부어 둘이 같이 먹었다. 나는 아직도 봉지라면보다 야외에서 먹는 컵라면이 더 좋다.
나는 그런 아빠가 좋았다. 그런 아빠를 보면 아빠가 나를 좋아한다는 걸 알 수 있어서 좋았다. 아빠는 나랑 산에 가는 걸 무척 좋아했다. 그래서 언젠가는 이번주는 산에 가기 귀찮다는 어린 나에게 제발 한 번만 가자며 졸라대기도 했다. 내리막길에서 먹는 컵라면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생각해보라고 꼬드겼다. 그럼 나는 고민하다가 그래 가자!를 외치며 또 한번 아빠의 손을 잡는다. 그렇게 나를 꼬드겨 산에 간 아빠는 조금 걷고 힘들다 하는 어린 딸을 막무가내로 끌고 올라간다. 내가 너무 징징거리자 아빠는 다신 너랑 산에 안 가! 라며 절교를 선언하는 친구처럼 말하기도 했었다. 그래놓고선 다음주가 되면 또 나에게 슬쩍 말을 걸었겠지.
민정아 이번주는 수락산이다-
나는 한때 '슈퍼맨이 돌아왔다' 등 미디어를 통해 그려지는 '딸바보' 아빠를 가진 딸들이 그렇게 부러웠다. 너무 부럽고 시샘이 나서 무뚝뚝한 우리 아빠가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머리가 어느 정도 크고서부터는 나는 산에 가자는 아빠의 제안을 거절하기 시작했다. 사춘기부터 멀어진 아빠와 딸의 사이는 서먹서먹했다. 아빠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눈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우리 아빠는 나에게 관심이 없어, 우리 아빠는 날 사랑하지 않아, 우리 아빠는 날 방치했어, 돈만 벌어다주면 다야? 하는 식으로 피해의식은 눈덩이처럼 커져만 갔다. 나에게 무슨 나쁜 일만 일어나면 이건 다 사랑 없이, 표현 없이 키워준 탓이다-라는 식으로 원망의 회로를 돌리는 나쁜 버릇이 생겼다.
그런 내 생각이 차츰 깨지게 된 계기는 대학원에 너무 가고 싶은데 학비가 고민돼 무작정 걸었던 아빠와의 통화에서였다.
그때 아빠는 고령근로자가 되어 임금피크제도 아래 있던 때라 혹시 회사에서 학비 장학금이 나오려는지 물어봤는데 안 된다고 하기에 단념하려 했었다. 그래 알았어- 하며 전화를 끊으려는 나에게 아빠는 물었다.
"그거 너 커리어에 도움 되는 거야?"
"엉"
"그럼 아빠 비상금 있으니까 그걸로 해."
아빠는 어떤 대학교 무슨 대학원인지 어떤 전공인지 왜 가려 하는지 나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 하나도 물어보지도 않고 비상금을 주겠단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때 직감적으로 알았다. 아빠에게 나는 목적 그 자체라는 걸. 같이 산에 오르던 그때처럼 나의 존재 자체를 좋아한다는 걸.
그러면서 차츰 아빠와의 관계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물론 겉으로 갈등이 심했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고 내 마음속으로 혼자 오해하고 원망하던 거라 내 태도가 바뀌기 시작했다는 게 더 맞는 말이겠다.
사회생활의 힘듦을 알고 나선 집에 오면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아빠가 안쓰러워졌다. MBTI를 해보라고 시켜보니 아빠는 INTJ였다.(ㅋㅋㅋ) 나랑 표현방법이 다른 게 이해가 갔다. 그렇게 나이를 먹을수록, 다양한 루트로 아빠를 이해해보고 나니 아빠가 내 생일을 까먹어서 다른 엉뚱한 날에 생일 축하한다는 카톡을 보내도 그냥 웃긴 에피소드 중 하나가 될 뿐이었다.
나는 이제서야 아빠의 존재 자체를 좋아하게 되었다.
이 짧은 글을 적는 데만 장장 7시간의 시간이 걸렸다. 쓰면서 너무 눈물이 나고 싱숭생숭해져서 마음을 가라앉히느라 썼다 멈췄다를 반복했다. 능력없는 큰딸이라 부모 부양도 제대로 못해주고 아빠가 여태까지 일하느라 고생한다는 생각에 미안하다. 깨어있는 여성인 척 하느라 결혼식 때 동시입장했는데 아빠 손 잡고 입장해볼 걸 후회된다. 그럼 이젠 아빠가 막무가내로 끌고 가더라도 웃으면서 같이 가줄 수 있을 텐데.
글모 선생님의 코멘트
아빠와의 소중한 순간이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