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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세이읽는남자 Oct 04. 2023

변했다 못생겨졌다

자랑은 아니고 비교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고백한다. 예전에 나는 인기남이었다. 혹시 그런 거 알지 모르겠는데, 잘생기거나 예쁜 사람은 자기가 그렇다는 걸 스스로 알 수가 없다. 예쁘다는 소리를 자주 듣거나 비슷한 맥락의 피드백(러브레터나 고백 같은)을 많이 받으면서 ‘아, 내가 좀 먹히는 스타일인가 보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그랬다. 남중, 남고에서는 그런 말을 해주는 친구들이 없어서 몰랐지만(남자들끼리 그런 말을 잘 안 하기도 하거니와 ‘야 인마, 너 정도면 괜찮지’라고 친구가 말해준들, 와닿지 않는다) 여자들이 모인 곳에 가니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쪽지를 받거나 ‘너, 잘생겼다’ 하는 소리를 자주 듣게 되면서 ‘그런가, 뭐 그런 거 같기도 하고’ 하며 서서히 내가 외모적으로 꽤 괜찮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밸런타인데이에 초콜릿을 스무 개 넘게 받은 이야기, 서로 나랑 사귀겠다며 지들끼리 싸운 이야기, 내 이름을 팔에 새기고 다니던 여자애 이야기 등등 더 하고 싶지만, 적당히 여기서 마무리하는 게 좋겠다).


대학생 때는 내가 어느 정도 잘난 구석이 있다는 걸 아는 상태로 지냈다. 아니나 다를까 뭐, 내 입으로 이런 얘기 하긴 좀 뭣하지만 뭐, 거의 내가 픽 하면 대부분 뭐, 하여간 그랬다. 나쁘지 않았다(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하다 손님에게 헌팅당한 이야기나 8층 아동복 매장 직원이 대시했던 이야기나 술 마시다가 말을 걸어오는 여학생 이야기는 굳이 안 하고, 적당히 마무리하는 게 좋겠다. 자랑 같으니까)


본인이 자신을 마주하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빛에 반사되는 모습을 통해서 시각적으로 볼 수 있다. 거울 같은 게 그런 거다. 두 번째는 내가 바라보는 타인의 모습으로부터 내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중에서 사람들 간의 인기나 호감 같은 건 바로 이 두 번째 방법으로만 인지할 수 있다. 미의 기준은 상대적인 것이고 주변에서 선호하는 방향으로 정해지기 때문에 나 혼자 거울을 보면서 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는 20살 성인이 돼서부터는 항상 주변에서 호감을 받는 편에 속해서 살았다. 굳이 거울로 내 모습을 확인하지 않더라도 내가 스스로 인지하는 나의 모습은 인기남, 그러니까 사람들이 호감을 느낄 만한 외모라고 생각을 하며 살게 된 것이다.


길을 걸을 때 내 눈에는 내 얼굴을 제외한 나머지 몸뚱어리만 보인다. 그때 나는 내 얼굴이 얼추 내가 리즈 때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집에서 거울은 안 보냐고? 본다. 그런데 희한하게 집에 있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여전히 20대와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아주 조금, 정말 미미하게 달라진 점이 있는데 그건 세월의 흔적으로 얼마든지 넘길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고, 본질은 거의 변한 것이 없다고 느낀다(나만 그런 거 아니다. 집에 마술거울 하나씩 다 있지 않나).


그런데 가끔 이질적인 기분을 느낄 때가 있었다. 어느 날 회사 후배가 나를 캐리커처를 했다며 보여줬다. ‘응? 이건 내가 아닌데’ 생각할 새도 없이 주변에 직원들이 ‘정말 똑같다’며 깔깔대고 웃는다. 나도 쿨하게 ‘비슷하게 잘 그렸네’ 했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림 속에 나의 얼굴은 조롱박처럼 하관이 둥글고 크고 넓은데 눈 코 입은 전부 중앙에 몰려 있었다. 나는 계란형 얼굴에 짙은 눈썹과 부리부리한 눈동자를 가진 아이돌 같은 인상인데. 이건 뭐가 좀 잘못되었다 싶어, 집으로 그림을 가져와서 같이 살고 있는 사람에게 보여줬다.


“누군지 몰라도 실력 있네, 그냥 똑같은데?"


하며 냉장고에 자석으로 그림을 붙였다. 거울을 다시 봤다. 아주 조금, 미세하게 얼굴이 커진 느낌은 있지만 그래도 본래 틀은 거의 변한 게 없는데 뭐가 비슷하다는 거지. 하긴 뭐, 캐리커처는 누구든 웃기게 그리는 거니까 하면서 넘겼다. 이후에도 비슷한 경험이 몇 번이나 있었는데, 예를 들면 회사 사내 방송에 나온 내 모습이나(방송은 원래 실물보다 크게 나온다) 누군가 찍어준 사진 속(그 친구 사진을 참 못 찍는 편이다)에 나는, 내가 생각했던 그것과 많이 달랐다. 뚱뚱하고 짜리 몽땅하고 얼굴은 성형 부작용 걸린 사람처럼 부어 있었다. 진정 내가 이렇다는 말인가. 인정할 수 없었다. 옆에서 돈가스 먹던 여자 고등학생들이 나보고 그룹 신화에 전진 닮았다며 수군대던 이야기를 내가 여기서 언급을 안 했던가.


그래 물론 살은 좀 쪘을 수 있다. 하지만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도 그렇고 왕년에 잘 나가던 축구 선수나 연예인들도 다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면 살이 찌는 거 아니냐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지금 나 정도면 그래도 나쁘지 않은 거라고 방어하면서 말이다.


그러다가 코로나 이후 4년 만에 일본 여행을 가게 되었다. 거기서 알았다. 나는 예전과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그동안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도 에이 설마 했었는데, 나는 그저 배 나온 사십 대 아저씨라는 걸 완벽하게 확인했다. 특히 애니메이션 굿즈 전문매장에서 키링을 고르고 있는 내 모습을 진열대 창을 통해 보아하니, 어쩌면 누군가는 나를 나이 많고 철이 없는 오타쿠로 볼 수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_ 왜 하필 이런 걸 여행지에서 느꼈는지 모르겠는데, 생각해 보면 ‘이방인이 보는 나’에 대해 조금 더 객관적인 판단이 있었을 수도 있고, 몇 년 전 일본에 왔을 때의 내 모습과 비교가 돼서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팩트가 쌓이고 쌓이다 여행지에서 폭발했었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정확하게 알았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미소년 아이돌 같은 외모가 아니다. 배 나오고 얼굴이 큰 아저씨가 되어있던 것이다. 어쩌면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는데 스스로 부정하며 환상 속에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있는 90년대 아이돌 리더 마냥, 사람들이 나를 단지 외모만으로 좋아해 주고 내가 하는 제스처 하나하나에 열광할 거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이미 주변 사람들은 나를 한물간 가수 취급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걸 지금 알았다. 인기자, 호감형 인생의 베네핏을 회수당했다는 생각에 그럼 도대체 나는 지금부터 어떻게 살아야 할지 우울했다.


얼굴에 여드름이 나고 코밑에 수염이 나기 시작했을 때 슬슬 몸의 변화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여드름은 나는 족족히 손톱으로 다 짜서 없앴지만, 수염은 좀 곤란했다. 친구 중에 누구는 아빠 면도기로 밀어버렸다는 애들도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검고 미세한 털들이 촘촘히 들어서며 코밑과 턱이 마치 멍든 것 마냥 시퍼렇게 물들면서 미국 농촌에서 일하는 징그러운 엉클밥 삼촌처럼 될 것만 같았다. 그리고 한번 밀면 죽을 때까지 영원히 면도를 해야 한다는 괴담이 돌면서 함부로 손을 대지 못했다. 대중목욕탕 가기 꺼려했던 것도 그즈음이었던 것 같다. 누가 어디에 털이 어떻다더라 하는 식의 이야기가 친구들 사이에서 돌았다. 신체의 변화에 대해 진행 경과를 서로 공유하고 출처가 불명확한 정보들을 나누며 우리는 그 일련의 과정에 집중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아직 먼 이야기였고 단지 그 작은 변화에만 집중했다.


지금, 그것과 비슷하다. 내 몸은 크게 변했다.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예전 같지 않은 상태가 되었다. 이걸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잘 모르겠고 혼란스럽다. 성장의 일부로 생각하고 자연스럽게 넘길 것인가, 아니면 자기 관리를 통해 다시 예전으로 돌려야 하나. 과연 돌릴 수는 있는 건가. 면도하는 방법을 누구도 알려주지 않은 것처럼 이런 변화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당연한 거야’, ‘나도 그랬어’ 혹은 ‘관리해야지’, ‘운동해’와 같은 심심한 후기 말고는 없었다.


참담하다. 유행가에서 청춘 타령하던 것이 이런 의미였단 말인가. 이쪽 그룹에서 저쪽 그룹으로 넘어가야 하는데, 나는 그러기가 싫었다. 내가 왜. 나는 아직 에반게리온을 좋아하고 크라잉 너트 비트에 해드벵잉 할 수 있는 그런 젊은 감각을 가졌는데. 내가 왜 저쪽으로 넘어가야 하냐고. 하지만 이쪽 편에 아이돌 그룹 르세라핌 멤버가 ‘아저씨 누구예요’ 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다. 저쪽에 노브레인 형님들이 ‘이쪽이잖아 일로와’ 하며 손짓한다.


신체의 변화가 당황스럽다. 젊음을 반납하기에 나는 여전히 너무나도 젊다. 하지만 똥차 빠지고 새 차를 파킹하듯 강제로 쫓기며 인생 3회 차를 준비해야 한다. 20살이 되기 전에 한차례 춘기형을 만났고(1회 차), 성인이 되어 마음껏 누렸고(2회 차), 40살이 되어 춘기형을 다시 만났다(지금, 3회 차). 춘기형은 항상 회차를 변경해야 할 때 미리 오는 사람인가 보다. 내 껍질을 벗겨주고 살을 다 드러나게 해서 새로운 옷을 입기 전까지 춘기형이 있다가 다시 가겠지. 새로운 옷을 입고 나는 다시 반환점 삼각콘을 돌아 걷거나 뛰면서 나아가야 한다.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춘기형과 함께 하는 이 시간을 어떻게 하면 잘 보낼 수 있을지 곰곰이 한번 생각해 봐야겠다. 메타 인지와 발견 그리고 성장. 그 프로세스 안 어딘가에 내가 들어와 있음을 인정하고 내 안을 면밀히 살피면서 그 이후를 계획하면 될 일이다.


그렇게 하건 말건 간에, 싫은 건 싫은 거다. 괴롭다. 내가 아저씨라니,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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