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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세이읽는남자 Oct 05. 2023

막막하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직장 생활을 한 10년 했고 팀장도 하고 있다. 내가 그동안 쌓아 올린 커리어를 기반으로 꾸역꾸역 한 10년 더 채울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직장 생활은 유한하고 벌이는 한계가 있다. 제한 없이 일할 수 있고 버는 것도 무한한 무언가를 찾아야 할 것 같다.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월 천만 원 벌 수 있습니다. 쉽습니다. 저만 따라오시면 누구가 가능합니다 라거나, 6개월만 하면 책 낼 수 있습니다. 간단합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면 능히 할 수 있습니다 식의 광고가 많이 보인다. 그것도 따라 하다 보면 새로운 영감을 얻거나 몰랐던 세계의 정보를 알 수 있어서 의미는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진입 단계에서나 유용한 지식이지 결국에는 본인 스스로 진듯하게 해당 프로젝트를 끝까지 몰고 갈 수 있는지가 관건이 된다. 거기에는 개인 선호와 신념 같은 게 결부되니까 조금 하다가 적성에 안 맞으면 ‘에이, 안 되는 거잖아 시간만 버렸네’ 하며 포기하기 일쑤다


그러면 도대체 뭘 해야 할까. 나는 앞으로 뭘 어떻게 해서 먹고살아야 할까,라고 춘기형이 묻는다. 비슷한 고민을 춘기형 1차 출정 때도 해본 적이 있었다. 대학교만 가면 불행 끝, 행복 시작의 길이 열린다고 어른들은 이야기하는데, 그게 도대체 뭔지, 정말 그런 게 있는 건지 계속 의문이 생겼다. 몰라도 일단 던져진 명제를 계속 되새김질하며 최면을 거는 수밖에 없었다. ‘대학생이 되면 내가 하고 싶은 걸 다할 수 있다, 대학생이 되어야 사회 일원으로 도태되지 않고 온전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와 같이 때로는 협박으로(낙오자 될래) 때로는 유혹으로(여자들이 줄을 선다) 그 알 수 없고 모호한 목표를 향해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그래도 그때는 강한 신념을 가진 부모와 사회가 나를 양 떼 몰듯 몰아줬으니까, 그런 사람이라도 있었으니까 그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는데 지금은, 내가 정해야 한다.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이 문제를 말이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왜 갑자기 나는 이런 질문을 던지는 걸까. 다니는 회사 열심히 다니고 주말에 가족들과 여행도 가면서 넉넉하진 않지만 알뜰살뜰 모으고 주식이나 복권 같은 재테크도 짬짬이 하면서 그렇게 알콩달콩 살면 되는 거 아닌가. 앞으로 어떻게 살까라니, 스무 살도 아니고 마흔이 넘은 사람이 그게 할 소리인가.


나도 이상해서 아, 춘기형이 와서 그런가 보다 하는 거다. 고등학생이나 할 법한 질문을 어른이 던지고 있다. 이거 참 어디 가서 말하기도 뭣한 혼자만의 비밀스러운 고민이다. 혹자는 그렇게 얘기할 수도 있다. 도대체 그 나이까지 도대체 뭐 했냐며. 적어도 스무 살 때부터 어떤 근사한 계획을 가지고 차근차근 그걸 쌓아 올리면서 마흔이 되었을 때는 거의 완성된 상태를 만들어야 하는 게 아니냐며, 새파랗게 젊은것들이 오히려 날 가르치려 들 수도 있다. ‘내가 아이폰 미리 알림에 날짜 설정해 놓고 너 마흔 됐을 때 연락한다. 피하지 말고 전화 꼭 받아. 안 받으면 죽는다’ 하고 싶은데, 영화 ‘바람’에 나오는 대사처럼 동생하고 그건 좀 아닌 것 같고. 그래 나도 계획이 있었고, 착착 진행을 했고, 이룬 것도 있고 못 이룬 것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지금 여기에(반환점) 내가 서있고, 그러니 그다음은 뭘까를 고민하겠다는 거지. 내가 뭐 계획도 없이 팅탕팅탕 놀다가, 앗 어쩌지 하고 있는 건 아니다.


인생이라는 길고 긴 항해를 이어가다가 ‘야야, 무인도다 잠깐 세워봐’, ‘아 왜요 바쁜데 그냥 가시죠’, ‘세워봐 인마 내가 좀 생각해야 할 게 있어’ 하며 잠깐 정박해서 ‘자 이제 우리 어디로 가볼까’, ‘그런데 그걸 왜 지금 얘기해요. 잘 가고 있었는데’, ‘무인도가 있었으니까! 육지 본 김에 잠깐 쉼표 찍고 가자 이거지! 아, 아까부터 자꾸 깐족깐족. 너 내려 인마. 걸어와.’ 하는 것과 같다.


부담감이 있다. 묵직하게 계속 나를 누르는 느낌이다. 잠깐 쉬어가자 정도가 아니라 빨리 뭔가 답을 찾아야 할 것 같은 조바심이나 초조함 그리고 불안이 내 안에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계속 이 문제는 오래 붙잡고 고민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단박에 답을 낼 수 없는 상태에서 고민에 대한 해결책을 몰아붙여 본 들 마음만 더 조급할 뿐이다. 그럼 이렇게 한번 해볼까. 고등학생인 나에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면 뭐라고 말해줄까. 아마도 이런 식일 것이다.


당장 네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는 게 먼저야. 그중에는 네게 주어진 의무와 하고 싶어 하는 선호가 섞여있겠지. 거기서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걸 발라내. 그리고 그걸 쭉 하는 거야. 계속하는 거야. 펑크 로커가 되고 싶잖아. 공부도 해야 되고. 그러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건 기타 코드를 외우는 거잖아. 그걸 해. 공부도 지금 당장 할 수 있잖아. 그것도 해. 동시에 하면 느리겠지. 느려도 어쩔 수 없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잖아. 그다음이 중요한데. 이제는 조바심과 불안감을 분리해서 처리해야 해. 초조하고 불안한 이유를 다시 생각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미 정했잖아.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었고. 정리됐잖아. 그러면 초조하고 불안함이 없어져야 하는데, 그대로지? 그건 전혀 다른 영역이라서 그래. 미래에 대한 단순한 공포나, 내 결정에 확신이 없어서 생기는 그런 막연한 불안감이지. 그건 그냥 지워야 해. 마치 ‘집에 불이 나면 어쩌지’와 같은 전혀 쓸데없는 걱정이라서, 그런 건 햇살 좋을 때 동네 한 바퀴 돌거나, 스티커 사진 찍고 다이어리 꾸미면서 사뿐하게 없애야 하는 게 맞아. 그런 건 지우고, 당장 할 수 있는 건 묵묵히 계속하고. 그러면 돼. 별거 없어.  


하긴, 정말 그런 것 같다. 발전적인 고민과 쓸데없는 걱정부터 분리를 시켜야 한다. 두 개가 합쳐져서 동시에 나를 압박하기에 마치 서로 같은 것이라 생각하며 머리를 부여잡지만 하나하나 엉킨 실을 풀어내듯 해체해 보면 진짜 필요한 고민이 나오고 버려야 할 걱정이 남는다. 고민에 대한 답은 누구나 자기 안에 있다. 나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바로 나니까. 그렇게 남은 걱정은 사실 잘 뜯어보면 원인이 전혀 다른 데에 있을 수가 있다. 성적이 마음먹은 만큼 안 나오니까, 경쟁자는 이미 안정적인 수준에 도달했는데 나는 계속 같은 상태로 남아있으니까 그게 불안해서, 공부하기 싫다, 대학교가 무슨 소용인가, 내가 하고 싶은 건 정녕 무엇인가와 같이 마치 진지한 고민인 것 마냥 설치는 거다.


내가 해야 하는, 할 수 있는 건 정해져 있다. 다만 그걸 못하고 있거나 해도 잘 안되거나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내 길은 어디에 있나 와 같은 푸념을 내어 놓는 것 같다. 그럴 때 잠시 무인도에 정박을 하거나 반환점 삼각콘 앞에 앉아서 혼자 곰곰이 생각을 해봐야 한다. 헬스클럽에서 머슬맨이 매일 근육을 펌핑하는 것처럼 자주 내 안을 들여다보고 참치 배 가르듯 하나하나 해체하여 필요한 건 가져다 쓰고 못 먹는 건 버리는 행위를 한다면 더 건강하고 튼튼해질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춘기형이 때마침 잘 방문을 해 줬다. 내가 예전에 비해서는 더 많이 성숙해 있는 상태라, 춘기형이 던지는 질문을 고이 받아서 내 안에서 요리조리 굴려보고 떡하니 정답을 물어올 수 있는 수준이 된다. 사실 뭐, 우리가 시간이 없지 머리가 없을까. 시간을 조금 가지고 생각하면 답은 금방 나온다. 그래도 사십 년 넘게 살았는데, 인생이라는 이 신에서 우리도 나름 베테랑이걸랑. 춘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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