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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세이읽는남자 Oct 06. 2023

나는 도대체 왜 태어났나

잘 밤에 철학하려고 자세 잡는 건 아니고. 인생의 반환점에 잠시 앉아 있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든다. 궁극적으로 나는 무엇이 되려고 하는가. 한마디로 왜 사나, 왜 태어났니 이런 건데. 결론만 놓고 보면 지금까지 살아온 역사는 결국 직장인이 되기 위한 길이었던 것 같다. 학교에 들어가서 친구들과 신나게 놀다가, 어느 날 갑자기 ‘지금부터 죽었다고 생각하고 3년만 버텨라‘고 하여 그렇게 했고, 덕분에 대학생이 되어서 취업까지 연달아 골인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아서 키웠다. 최종 내게 남은 전리품을 챙겨보니 직장, 아기, 그리고 같이 사는 사람 정도 되겠다. 조금 허무하다. 뭐야 이게 단가. 결국 직장인 되려고 여기까지 달려온 것만 같아 억울한 생각이 든다. 오케이 좋다, 뭐 어쨌든 그동안 즐거운 추억과 행복했던 시간도 있는 거니까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럼 앞으로는?


이제는 방향을 조금 틀어도 되겠다. 정말로 이대로 쭉 가다가는 평생 월급 받으며 살아야 하는, 월급 없이는 살 수 없는 지경이 될 수도 있다. 스스로 사냥하는 기술을 익히지 못하면 결국 내 목숨을 타인에게 걸어야 하는 사람이 된다. 고로, 나는 지금부터 직장 생활 해방을 목표로 두고 남은 인생을 달려야 한다. 기왕이면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걸로 하면 좋겠다.


그런 게 결국 꿈이다. 지금부터 나는 꿈을 만들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춘기형 1차 출정 때는 그걸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때는 내가 너무 어렸다. 하고 싶은 것이 있더라도 나를 둘러싼 철옹성 같은 성벽을 깰 용기도, 힘도, 머리도 당시 나에게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짝 담 정도는 넘어 보려고 시도했던 적이 있었는데, 바야흐로 수능을 100일 남겨둔 상황에서 불안함과 초조함이 문지방을 넘어 버렸다. 갑갑했다. 너무 하기가 싫었다. 학교도 독서실도 문제집도 모의고사도 지겹고 징글징글해서 다 때려치우고 싶었다. 다녀본 사람은 알겠지만 사설 독서실은 상상하기 너무 좋은 환경이다. 마치 어느 주술사가 죽은 영을 소환할 때 꼭 필요한 몇 가지 도구가 있는 것처럼, 독서실 조명과 두꺼운 문제집과 영어 사전과 그리고 손위에서 돌리기 좋은 적당한 크기의 펜만 있으면 곧 바사삭하고 상상의 나래가 내 머릿속에서 펼쳐진다. 그렇게 귀여운 방법으로 현실 도피를 즐겼다.


수많은 군중들이 무대를 바라보고 있다. 무대 위에서 보컬이 노래를 마치고 뒤로 빠지면 드디어 내가 기타를 연주하며 앞으로 나선다. 내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관객들이 환호한다. 개중에는 끌어 오르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양 속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실성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크한 나는 다리를 넓게 벌리고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전자 기타를 연주한다. 클라이맥스에 다다랐을 때 고개를 들어 관중석 쪽으로 미소를 보낸다. 고개를 까딱까딱하면서. 연주가 끝나고 뒤로 빠지며 다시 보컬에게 자리를 양보하기 직전에, 기타 피크를 저 멀리 던져버린다. 그거 줍겠다고 또 관객들이 아수라장을 만든다. 보컬 뒤에서 묵묵히 기타를 계속 연주한다. 고개를 까딱까딱하면서. 그래! 나는 기타도 치고 노래도 하는 펑크 로커가 되어야겠다.


실용음악과가 있는 대학교를 몇 군데 알아본 뒤 응시 요강을 살폈다. 이론은 수능으로 대체하고 실기는 자유곡과 지정곡을 하나씩 연주하는 걸로 평가를 한다. 수능 점수야 공부를 영 못하는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자신 있었는데, 이론보다는 실기에 배점된 비중이 더 크다. 100일을 남겨놓고 두 곡을 연주하는 게 가능할까. 학원을 전화를 해보기로 한다.


“여보세요”


“아, 안녕하세요. 저는 고등학생이고 실용음악과를 지원하려고 하는데, 저기 혹시 지금부터 100일 동안 일렉을 연습하면 지정곡 하나에 자유곡 하나씩 연주가 가능할까 싶어서요”


“음, 100일이요”


“네“


"모차르트라면 가능하겠네요“


”네? 아, 모차르트. 아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민망함에 얼른 전화를 끊고 독서실 자리로 돌아와 ’어디까지 풀었더라‘ 하며 문제집을 뒤적거렸다. 오히려 명쾌하게 이야기해 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학생 하기에 달렸어요‘와 같이 애매하게 말해서 헛된 희망을 품게 만들었다면 마음은 더 복잡했을 것이고 나는 계속 상상의 나래를 펼쳤을 것이다(30일 만에 완료하고 천재를 만났다며 당장 밴드를 결성하자는 제안을 받는다거나). 그런데 한편으로는 조금 괘씸하기도 했는데, 모차르트는 피아노 치는 사람이기도 이거니와(나는 일렉이라고 했는데) 그리고 혹시 알아? 내가 기타 신동일 수도 있는 일인데 한번 테스트받으러 와보라고 할 수도 있는 거지. 그걸 굳이 비유까지 써가면 단칼로 자른 것이 야속했다. 어쨌든 깨끗하게 포기하고 나중에 대학가요제 같은데 나가서 오늘 일을 에피소드로 쓰면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일 말고는 딱히 내가 꿈을 꾸거나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을 한 적은 없었다. 워터파크에서 줄 서서 슬라이드 타고 내려오듯 물길 따라 부드럽게 달리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지금, 인생의 반환점에 앉아서 생각한다. 지금부터는 좀 달라야 하지 않냐면서.


그렇다. 비슷한 고민이다. 해야 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의 괴리. 학생 때는 공부를 해야 했다. 그거 안 하면 정말 큰일이 난다. 선생님은 물론이고 엄마 아빠까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미친 거 아니냐면서 나를 몰아세울 것이다. 그래서 그냥 했다. 대학도 갔고, 다 했다. 지금은 회사에 다니고 있다. 월급을 받아야 토끼 같은 자식과 여우 같은 마누라를 먹여 살릴 수 있다. 만약에 내가 내 꿈을 이루기 위해서 직장인을 안 하겠다고 하면 여우가 숨기고 있던 8개의 꼬리를 갑자기 허공에 붕 띄우며 두 눈 시뻘겋게 뜨고 정 그렇다면 네 생간이라도 내놓으라며 위협할 것이다. 그래서 때려치울 수 없다. 그냥 계속 다녀야 한다.


’엄마, 세상에는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성공할 수 있는 게 많이 있습니다. 제가 그 길을 떠나보려고 하니, 저를 믿고 응원해 주십시오‘ 라거나, ’여보, 내가 직장인 하려고 태어난 것도 아니고 평생 이렇게 살 순 없잖아. 나 믿고 딱 일 년 만 고생해 보자. 할 수 있지?‘ 하는 용기가 나에게는 없다. 그때도 없었지만 지금도 없다. 다만, 그때와 지금이 다른 건 지금껏 살며 익힌 ’유연성‘이라는 기술이다. 밤에 모두가 잘 때 조용히 칼을 가는 방법을 안다. 계속, 꾸준히, 거의 습관이 되도록 매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실력을 키우고 실험을 해보기도 하면서 언젠지 모를 훗날을 도모한다. 그런 잔기술이 생겼다. 아무렴 내가 그 꼬맹이 고등학생과 같을쏘냐. 나는 사십 대다. 한층 더 업그레이드되었다.


두 번째 찾아온 춘기형과 함께 고민한다.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 앞으로 어떤 삶으로 살 것이냐. 딱히 정답을 찾은 건 아니지만, 몰입해서 고민하다 보면 영감이 떠오르거나 계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 시기를 건전한 고민과 긍정적인 에너지로 잘 보냈으면 한다. 자칫 춘기형의 무게에 짓눌려 동굴로 깊숙이 빨려 들어가거나, 에라 모르겠고 하면서 대짜로 뻗어버리면 곤란하다. 고등학생 때도 춘기형 잘 만나고 헤어졌다. 지금 나는 훨씬 어른인데 그거 못할까. 얼마나 더 성숙하려고 이러는 건지, 멋진 답을 내려고 그러는 건지는 몰라도 성장과 변화가 필요한 시점에 춘기형을 잘 만난 것 같다. 춘기형. 사랑해. 내 집처럼 편안히 있다가 가셔. 대신 오래는 안되고 짧고 굵게. 오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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