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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세이읽는남자 Aug 11. 2022

나는 여러 개입니다

너는 몇 개니? 나는 여러 개야.


잘 봐봐. 집에서의 나랑, 회사에서, 친구 만날 때, 이성이랑 있을 때 전부 다르지 않아? 상황이나 목적에 따라 다른 내가 되잖아. 근데 그게 맞지. 사람은 누구나 다양한 모습이 있다는 거. 다들 인정하잖아. 물론 정체성으로 연결되어 있고 성향이 동질성을 유지시켜 주긴 하지만, 우리는 확실히 자주자주 그때그때 달라. 근데 뭐. 그게 나빠? 아니야. 오히려 자연스러운 거지. 나는 더 나아가서 서로 다른 컨셉으로 몇 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는 거. 좋다고 생각해. 구분만 잘하면 말이야.


나라는 존재는 주변에 의해서 규정되는 거잖아. '나다운 모습’이라는 건 그동안 내가 ‘주변에 보였던 모습’이잖아. 상대가 나를 예측할 수 있게 해 줘야 나에 대한 경계가 풀리잖아. 인간은 늘 미지에 대해 경계하니까. 그들이 나에 대해 '이 사람은 이런 타입'. 이렇게 구분할 수 있도록 내가 좀 일관성 있게 굴어줘야 하는 거지. 그래야 나는 호의를 받을 수 있어. 그게 아니라 이런 줄 알았던 애가 저렇게 행동하면 ‘기대와 다른’ 혹은 ‘배신’ 뭐 이런 평가를 받게 되고 배척 당해. 그리고 나에 대한 경계태세 부활 혹은 집단에서 암묵적 퇴출. 이렇게 되는 거잖아.


그래서 나는 오히려 컨셉을 몇 개로 나눠서 각 활동 영역별로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 아예 의식적으로 캐릭터를 정하는 거지. 회사에서 나와 집에서 나. 친구들 사이에서 나와 취미활동에서 나. 이렇게 캐릭터를 나누는 거지. 그리고 정한 캐릭터대로 행동하는 거야. 물론 너무 극과 극이면 안돼(지킬과 하이드는 안된다는 거야, 물론 우리가 정상적이라면 그렇게 하려고 해도 안되긴 할 거야)


이렇게 하면 좋은 게. 상호 결핍을 좀 채워주거나 막힌 욕구를 풀어줄 수가 있어. 그러니까 이쪽 캐릭터는 좀 조용하고 양보를 많이 하는 타입이라면. 답답할 수 있잖아. 참는데도 한계가 있지. 그러면 저쪽 캐릭터에서 쏟아내면 돼. 사실 내가 그림 그릴 때 좀 그러거든. 나는 회사에서 짜증, 화 안 내려고 하거든. '좋은 사람 콤플렉스'가 있어서 사람들이 나를 좋게 기억했으면 하는 욕구가 커. 근데 그걸 유지하려면 힘들 수 있잖아. 특히 직장 생활이 답답하고 억울하고 분한 일 투성이잖아. 그러면 집에 와서 그림에다 쏟아내. 그래서 내 그림이 보면 좀 선이 날카롭고 색이 지저분해. 화난 사람처럼 선을 쑥쑥 빼고, 색을 쓱쓱 문질러 대거든. 막 쏟아내는 거지. 분풀이하는 사람처럼.  


원래 사람은 몇 가지 인격을 가지고 있는 거 같아. 그런데 사회 규범이나 질서 이런 걸로 억지로 통일시켜 놓으니까 욕구불만이 생기고 재미없고 그런 거지. 그래서 우리가 좋아하는 거, 관심 있는 게 있으면 그쪽으로 본인만의 캐릭터를 하나 만드는 거야. 그 캐릭터로 활동하면서 욕구도 좀 풀고 못 해본 것도 해보고. 그러면 재미있을 거 같은데?  


특히나 요즘은 그런 거 하기 좋잖아. 마음만 먹으면 참여할 수 있는 오프라인 모임도 많고, 비대면으로 인터넷에서 활동할 수 있는 공간도 많잖아. 자자, 건전한(!) 방향으로 몇 가지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는 것. 추천합니다. 저도 몇 개 가지고 있습니다. 아주 재밌고 좋아요.


끝.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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