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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세이읽는남자 Oct 05. 2022

양반처럼 출근하는 노비

지하철역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애플사에서 출시한 블루투스 이어폰 에어팟 프로를 귀에 꽂는다. 젊은 후배가 ‘신세계’라며 에어팟 프로의 ‘노이즈 캔슬링’ 기능을 극찬하기에 ‘그래? 그 정도야?’하며 구입 했다. 아, 역시 그의 말이 맞았다. 귀에 꽂는 순간부터 ‘슈웅’하며 주변 소음을 쭉 빨아 당겨 ‘캔슬링’ 해주는데, 내 길고 긴 이어폰 인생에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마침 이 기술은 ‘언제, 어디서나 작업하기’를 꿈꾸는 내게는 정말 필요한 제품(여보, 진짜야!) 이었다.


새벽 굿모닝 때 듣던 것과 같은 플레이 리스트를 재생하며 이북 리더기를 가방에서 꺼낸다. 최근에 읽고 있는 것은 앤 라모트의 ‘쓰기의 감각’이라는 책인데 글쓰기에 대한 기술적인 정보도 좋지만, 무엇보다 ‘그것은 마치’로 시작하는 작가의 비유가 너무 재밌다. 지하철 안에서 웃음이 빵 터진 적도 몇 번 있었다(유튜브가 아니라 책을 읽다가 웃는 사람은 왠지 좀 멋진 것 같아서 재밌는 부분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웃는 편이다).


책을 조금 읽다 보면 금방 버스가 도착한다. 스마트 워치로 에어팟의 ‘노이즈 캔슬링기능을 끄고 ‘주변음 허용모드로 전환한다버스 카드를 찍은 후에 제일 뒷좌석으로 가서 앉아 노이즈 캔슬링 다시 켜고 이북 리더기를 꺼내서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한다.


다음 정류장부터 사람들이 대거 버스에 올라타기 시작한다. 내가 앉아있는 뒷좌석 자리까지  찬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독서에 빠져있다. 책을 열심히 읽다 보면 슬슬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한다. 하긴 나는 오늘 새벽 4 30분에 일어났고, 지금 책을 읽고 있는 시간은 6 30분이다. 하지만  지하철역에 도착한다는  알기 때문에 잠을 청하지 않고 조금  힘을 내어 책을 읽는다. 지하철역이 다가올 때쯤 이북 리더기를 가방에 넣고 휴대폰을 꺼낸다. 유튜브 어플을 열고 걸으면서 들을  있는 콘텐츠를 선택하여 1.75배속으로 재생한다.


버스에서 내릴 때는 가장 늦게 내린다(가장 뒤에 앉았으니 당연한 소리일 것 같지만, 뒷자리 승객 중에서도 먼저 내리기 위해 슬금슬금 버스 뒷문으로 향하는 사람도 있다). 버스 뒷문이 열리면 그때부터 ‘군중의 질주’가 시작된다. 다들 빠른 걸음으로 지하철역을 향해 질주한다. 반면에 나는? 천천히 걷는다. 나의 느린 속도가 타인의 진루를 방해하면 안 되기 때문에 요령껏 요리조리 피해 가며, 천천히 걷는다(요령은 벽 쪽으로 붙어서 가기, 추월차선은 항상 비워두기, 뒤에서 누가 바짝 붙어오면 잽싸게 옆으로 비켜주기가 있다). 열차가 곧 도착한다고 해도 천천히 걷는다. 그다음 열차 혹은, 그다음다음 것을 타도 충분하다는 계산이 사전에 이미 끝난 후라서 가능한 일이다.


내가 타는 역은 아침 출근시간에도 열차에 제법 자리가 있는 편이다. 그다음 역부터가 사람들이 많이 타는데, 물론 나는 그전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다. 자, 내 귀에 에어팟 프로는 지하철 내부 소음을 만족할 수준으로 차단하고 있고, 대신에 시즈코 모리(Shizuko Mori)의 피아노 연주곡이 플레이되고 있으며, 내 손에는 가볍고 세련된 이북 리더기가 올려져 있고, 나는 좌석에 편하게 앉아있다. 완벽한 출근길이 이런 게 아닌가.     


이 상태로 30분을 가면 홍대입구역이다. 나는 그곳에서 내려서 2호선으로 환승을 해야 한다. 홍대입구역 바로 직전 역이 디지털미디어센터 역인데, 거기서 이북 리더기를 가방에 넣는다. 그리고 손을 모으고 눈을 감는다. 아침부터 계속 책을 읽은지라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것도 있지만,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지기 위함이다. 책에 내용을 곱씹어 보거나 오늘 해야 할 일 같은 걸 상상하는 시간이다. 손을 모으다 보니 마치 기도하는 사람처럼 된다. 그래서 가끔은 ‘에라 기왕 이렇게 된 거’하며 실제로 기도를 하는 경우도 있다.


홍대입구역에 도착해서 지하철 문이 열리면 다시 ‘군중의 질주’가 시작된다. 모두 에스컬레이터를 타기 위해 길게 줄을 선다. 나는 그들의 동선과 반대로 움직여 의자로 가서 앉는다. 그러고는 휴대폰을 꺼내서 인스타그램 어플을 연다. 어제 그린 일러스트를 업로드한다. 해시태그는 휴대폰에 미리 저장되어 있는 것을 쓰는데, ‘드로잉’, ‘그림스타그램’과 같이 이미 이 길을 걷고 있는 선배 일러스트레이터들을 따라 해 본다. 그림은 낙서 수준이라 ‘좋아요’가 많이 달리진 않는다. 글을 쓰고 있는 현재 팔로워는 200명이 조금 넘는데 '좋아요'는 30에서 40개 수준. 기가 막히게 매번 그렇다. 그래도 노출수는 꾸준히 늘고 있는 거 같으니까. 일단, 계속, 업로드해 보고 있다.


인스타그램 업로드를 마치고 주변을 둘러보니 아무도 없다. 그렇다, 한 3분 정도 기다리면 사람들과 경쟁하며 걷지 않아도 된다. 한 무더기 군집이 사라지고 난 후에 홀로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걸어간다. 유튜브에서 들을 수 있는 콘텐츠를 1.75배속으로 다시 플레이하고 스마트 워치로 ‘실외 걷기’를 체크한 후 2호선으로 환승하기 위해 산책을 시작한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오면 경의선에서 환승하려는 사람들과 만난다. 이곳도 대규모 군집이 형성되기에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이미 그들을 피하는 시간까지 모두  계산되어 있다. 경의선 군집까지 모두 피해서 산책을 나서면 진짜 평일  시간대 인가 싶을 정도로 한산하다.  방법을 아는 사람은 아직은 나밖에 없는  같다. 때는 혼자 걷고 있으니 말이다.


2호선 홍대입구역에 도착해서 지하철을 기다리며 유튜브를 끄고 다시 피아노 모드로 전환 후 이북 리더기를 꺼낸다. 열차가 도착하고 독서의 마지막 스퍼트를 올린다. 그리고 시청역에서 내리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군집은 1차 모두 보내고 나는 느지막이 계단을 올라간다. 스마트워치를 ‘계단 오르기’로 맞추고 마지막 출근 단계를 수행한다.


계단의 끝에서 나는 드디어 지상의 세계를 마주한다. 숨을 쉴 때 느껴지는 공기가 지하와 다름을 느낀다. 지상의 공기는 무게가 가볍고 온도는 차갑다. 밤새 따뜻하게 데워진 입안으로 얼음 가득 차가운 오설록 녹차가 천천히 들어와 ‘어? 차가워?’ 하며 알게 되는 아침의 느낌. 그것과 비슷하다. 계단을 오를수록 내 시야에 정면에서 보이는 도로 위 자동차들은 ‘아, 그렇지 자동차는 지상에서만 다닐 수 있는 도구지’하며 내가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왔음을 실감케 한다. 그리고 하늘이 보이고 구름이 보인다. 그래, 여기는 지상이 확실하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주인공이 교도소 지하 하구도를 따라 탈출에 성공한 뒤 내리는 비를 맞으며 죄수복을 찢어 던져 버렸듯이, 내 얼굴에 붙어있는 이어폰과 마스크를 모두 벗어 주머니에 넣는다. 그리고 조금 걸어 올라간 뒤 흡연이 가능한 공원에서 아이코스를 꺼낸다. 여기까지 온 노고를 스스로 위로하며 잠깐 생각에 빠진다. 그리고 출근길 사람들을 관찰한다.


지상의 출근자들은 지하와 다르다. 여유가 있다. 커피를 뽑아 들고 가는 자가 있는가 하면, 동료의 어깨를 툭 치며 웃기까지 한다. 회사 근처라 그런지 출근자들은 마음의 안정을 찾은 것 같다. 그래 이곳은 평화다. 다행이다 모두들.  


그렇게 나는, ‘오늘도 무사’ 출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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