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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세이읽는남자 Oct 14. 2022

출근길이 급하고 바쁜 이유

첫 직장 입사 면접날. 나는 난생처음으로 서울 강남이란 곳에 가보았다. 강남대로를 중심으로 양쪽에 높게 솟은 빌딩들을 보며 크게 놀랐는데, 신해철이 1992년에 발표한 곡 ‘더 늦기 전에’에 나오는 가사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하늘 끝까지 뻗은 회색 빌딩 숲” 정말 딱 그런 풍경이었다. 가사의 의미를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한 그 순간, 나는 고대 잉카문명의 난해한 암호를 풀어낸 고고학자의 희열과 “역시, 신해철은 강남에 가본 서울 사람이었어!”라며 범인을 지목하는 명탐정의 자신감을 흡수하며 처음 보는 낯설고 굉장한 풍경에 압도당하지 않으려 애썼다.  


입사가 확정되고 첫 출근 날에 나는 또 한 번 낯선 풍경을 목격하게 된다. 강남역에 도착한 열차의 문이 열리자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졌고, 마치 뭔가에 홀린듯 한곳을 향해(아마 지상으로 향하는 계단) 질주하는 모습이었다. ‘뭐, 누가 내 동생을 때렸다고? 누구야? 어디야?’하며 쫓아가는 사람들처럼 출근하는 사람들의 걸음은 빠르고 급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나 역시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다는 것이다. ‘동생을 왜 때렸답니까? 같이 가시죠. 어디랍니까? 앞장서세요’라는 듯이 도대체 나는 왜 빨리 걷고 있는 거지? 이유는 간단하고 허무한데, 그냥 뒤에서 사람들이 쫓아오기 때문이었다. 나를 앞질러 가려는 사람에게 몇 번 툭툭 치이고 나면 ‘아, 이곳 사람들은 내가 빨리 걷기를 간절히 원하는구나’하고 깨닫게 되고 그 즉시 그들과 스텝을 맞추게 된다. 그렇게 내 발걸음 역시 빨라지는 것이었다. 그 당시 나는 출근시간 사람들이 빨리 걷는 이유를 ‘다른 사람들이 빨리 걸으니까!’라고 결론 내려버렸다.


현재로 돌아와서, 출근시간 빠른 걸음은 공항 철도와 홍대입구역 어디든 마찬가지다. 문득 이런 호기심이 생긴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빨리 걸으니까 나도 빨라질 수밖에’로 결론을 내렸는데, 그렇다면 바로 그 ‘다른 사람들’은 무슨 이유 일까? 나를 추월해서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의 팔을 붙잡고 “빠르게 하나만 물어보겠습니다. 왜 이렇게 급하게 가십니까?  혹시 지각인가요?” 하며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는 없었고, 다만 진지하게 생각은 해보았다.


결론은 이랬다.


출근은 매일 같은 것을 반복하여 탄탄하게 굳어진 루틴 즉, 습관이다. 습관은 의식하지 않아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라 효율적이고 에너지 소모가 적다. 우리 뇌는 그런 걸 좋아한(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출근은 무의식이 진행한다. 자율주행 자동차처럼 내 앞과 옆 사람들의 간격을 자동으로 조절하며 알아서 목적지까지 나를 인도한다. 그러면 왜 하필 바쁘고 급하게 습관화가 되었을까? 가령 여유를 가지고 산책하듯이 걷고, 가끔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아, 오늘은 구름 참 예쁘네” 할 수는 없는 것인가. 길가에 핀 꽃들을 보며 “어머, 어쩜 이렇게 예쁜 꽃이, 하필 내 출근길에 피어 주었구나 정말로 감사하다” 이런 식으로 형성되지 못했을까.   


아마도 그건 의식이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은 아닐까. 무의식의 목표는 엄청 단순해야 한다. “각 치아별로 10번씩 칫솔질을 하고, 물로 3번 헹군다 매일, 같은 방법으로, 실시!”와 같이 간단해야 가능하다. 출근길 무의식에 저장된 명령어는 아마 “늦지 않게! 정해진 길로!”쯤 될 것이며, 이 중 ‘늦지 않게’라는 명령어가 우리 발걸음을 빠르게 재촉하는 것 같다.   


나는 출근길 루틴에 변화를 주기로 했다. ‘늦지 않게 목적지까지’와 같은 단순 명령이 아닌 필요하고 유익한 좋은 습관들로 시간을 채우기로 한 것이다. 2가지를 계획했다. 환승이나 계단을 오르는 것과 같이 이동이 필요한 동적인 구간에서는 유익한 유튜브 콘텐츠(자기 계발, 동기부여)를 귀로 듣기로 하고, 기다리거나 앉아 있는 정적인 경우는 독서를 하는 것이다. 유튜브는 어렵지 않게 수행할 수 있었다. 문제는 독서인데, 처음에는 종이책을 직접 들고 다녔다. 그런데 종이책은 손에 들고 다니기 거추장스럽고, 읽을 때도 한 손으로 오래 받치고 읽다 보니 팔이 너무 아팠다. 그때 우연히 알게 된 것이 이북 리더기였는데, 결코 싸지 않은 금액임에도 단번에 구매를 했다. 그리고 월 정액제로 책을 무제한 다운로드할 수 있는 서비스에도 가입을 했다. 이북 리더기와 월 정액제 다운로드 서비스로 거짓말 조금 보태면 이틀에 책을 한 권 읽을 정도로 독서 생산성이 좋아졌다. 그렇게 매일 출근길에서 동기부여를 주입하고 독서를 하는 것으로 루틴을 만들었다.  


이유? 나는 나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을 내가 직접 지배하기를 바란다. 지금은 직장이 있기 때문에 회사와 계약된 시간은 내 것으로 만들 수 없다. 그러나 출근은 사정이 다르다. 엄밀해 말하자면 이 시간은 회사와 무관한 내 시간이기 때문에 내가 지배할 수 있다. 그래서 여기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작은 지역부터 차근차근 정복하여 천하를 통일하려는 나의 원대한 꿈.


그 서막이 바로 이 출근길이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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