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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세이읽는남자 Dec 13. 2022

대충 먹고살고 매일 기쁘고

산에서 내려오기로 한 결심은 아주 우연하게 다가왔다. 지루함도 두려움도 그리움도 아닌 바로 자신감 때문이었다. 어느 날 번쩍하며 깨달음을 얻었는데 세상의 이치가 아주 간단하게 느껴졌다. 이 산과 나무와 바람 그리고 세상은 모두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들이 마치 양 떼가 울타리 안에 갇혀있듯 모두 내 안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비가 오던 어느 날 갑자기 넘치는 자신감에 어쩔 줄을 몰라했다. 옷을 모조리 벗고 내리는 비를 맞으며 큰소리로 웃었다. 소리를 지르다가 웃다가 또다시 소리를 질렀다. 눈물인지 비인지 모르는 액체가 내 뺨을 가득 적셨다. 그래, 나는 이제 아무것도 두렵지가 않다. 내가 자연이다. 자연은 이 세상 어디에도 있다.


그날 밤 나는 결정했다. 시험해 보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자연의 세상이 아닌 사람들의 세상에서도 이 자신감은 유지가 될까. 지금 이 기운이 온전히 유지될 수 있을까. 나는 곧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우선 직접 만든 집을 모두 해체하여 자연으로 돌려보냈다. 가지고 있는 집기류는 흙이 될 수 있는 것은 흙으로 되돌렸고 거름으로 쓸 수 있는 것은 숙성하여 바닥에 뿌렸다. 쓰일 수 없는 것들은 산 아래 마을에 모두 처리하였다. 이제 남은 것은 배낭 하나와 몸 하나. 그것이 전부였다.


비워진 자리를 향해 합장을 하고 빠른 걸음으로 산을 내려왔다. 곧 정리된 길이 보였고 마침내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노인이 서 있었다.


“저기 혹시 지금이 몇 시입니까?”


나를 한참을 훑더니,


“한 둬시 됐지”


라고 하더니 노인은 뒷짐을 지며 자리를 피했다.


“네 감사합니다 어르신”


노인의 등에 대고 인사를 했다.


두시면 얼추 내가 계산한 시간과 일치한다. 나에게 시간은 자연의 시계, 즉 감각으로 터득된 시간이 전부였다. 통일된 시간은 사람들의 약속과 질서를 위한 것이다. 혼자 산에서 사는 사람에게는 필요 없는 것인데 오늘은 나도 약속을 해놓은 상태라 정확한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다행히도 노인이 알려준 시간과 내가 산에서 터득한 시간이 거의 같다. 역시 산이 아닌 곳에서도 내 방법들이 통하는 것 같아서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버스정류장 의자에 앉았다. 가방에서 잘게 부순 느릅나무 껍질을 꺼내어 입에 넣었다. 입을 다물고 앞니로 오독오독 씹으니 나무의 향과 함께 떫고 쓴맛이 올라왔다. 미각에 자극을 주니 몸에 에너지가 생기는 것 같았다. 향이 가시고 나면 뱉었다. 씹었다 뱉었다를 반복하다가 우연히 노인 쪽을 바라보았는데 노인도 나를 보고 있다. ‘응? 왜요, 무슨 문제라도?’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하니, 한숨을 쉬면서 시선을 돌린다. 쯧쯧 혀를 차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다. 아무렴 내가 이상하기도 하겠지. 나는 지금 막 자연의 세계에서 내려온 사람이니까.


잠시 후, 회색 소나타 차가 버스정류장 앞에 섰다. 나와 약속을 한 사람의 차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차에서 30대 중반의 여성이 내렸다. 여자 치고는 몸집이 좀 있는 타입인데 뽀글뽀글한 단발머리를 하고 있으니 얼굴이 더 커 보였다.


“아, 선생님 시간 맞춰서 나오셨네요”


나는 느릅나무 껍질 부스러기를 다시 가방에 넣고 지퍼를 닫은 후 일어났다.


“네 방금 왔습니다”


눈웃음을 치며 가실까요, 하는 여자. 그래 기억났다. 이 눈웃음 때문에 내 마음이 열렸지. 계속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예쁜 것을 보면 계속 보고 또 보고 싶은 그런 마음. 그것 때문에 나는 프로그램 촬영을 수락했었고 인연이 되어 지금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차 뒷문을 열어 시트에 배낭을 내려놓고 나는 그녀의 옆자리 조수석에 앉았다. 자,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하는 말과 함께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창문 밖으로 아까 그 노인이 보였다. 고개를 까딱하며 작은 인사를 보냈는데 노인은 마치 머리로 탁구공이라도 튕겨내는 듯 고개를 팩 돌렸다. 부끄러움이 많은 노인이라 생각했다.


“식사는? 안 하셨죠?”


“네 그런데 배는 고프지 않네요”


“그래도 곧 점심시간인데, 순댓국 어떠세요? 이 근처에 유명한 데가 있거든요”


“뭐든 상관없습니다”


“네 그럼 그리로 모시겠습니다”


“네”


“그런데 어떻게 저한테 연락할 생각을 다하셨어요?”


당신 눈웃음이 다시 보고 싶어서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분명히 분위기가 어색해질 것이고, 그녀는 어떻게 받아쳐야 할지 당황할 것이다. 그녀를 곤란하게 하고 싶진 않았다.


“기억나는 전화번호가 그것밖에 없어서요”


“산은 다 정리하신 거죠?”


“네, 깨끗이 원래대로 만들어놓고 내려왔네요”


“혹시 왜 내려오기로 결정하신 건지 물어봐도 되나요?”


“갑자기죠 뭐. 산에 가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갑자기였고 내려오기로 한 것도 갑자기입니다”


“아 뭐 특별한 일이 있는 건 아니고요?”


“그런 건 없습니다. 그냥 갑자기 내려가야겠다 싶어 져서…”


나는 자연이다. 자연에 이유가 어디 있나. 이유를 찾는 건 인간의 생존 본능 때문이지만, 사실 자연 현상에는 이유 따위는 없다. 있다손 치더라도 인간은 알아낼 수 없다. 추정만 할 수 있을 뿐이지. 왜 인간이 오만한 줄 아는가? 그 추정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자연은 이유가 없다. 그저 갑자기 일어나고 갑자기 사라질 뿐.


“아 참참, 깜빡했네요. 이 차에 타셨을 때부터 녹화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기 앞에, 그리고 저기 카메라. 괜찮으시죠?”


“네 미리 말씀해주셔서 상관없습니다”


“사실은 저희가 지난번 촬영은 이미 후반 작업까지 모두 마친 상태였는데, 갑자기 내려오신다고 연락을 받고 기획을 조금 수정해서 가기로 했거든요”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방송 나가고 나서 이놈이 이제는 산속 생활 접었더라 하며 딴지 거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으니까, 스토리텔링 상 맞춰야 한다고 박 피디님 전화받았습니다”


“맞아요”


또 눈웃음. 이건 계속 의식적으로 연습을 하면 되는 건가 순간 궁금했다. 아니면 타고나는 건가.


“좀 어떠셨어요? 감회랄까”


“산에서 생활 말입니까?”


“네 살아보니까 좋더라 뭐 이런”


“그런 생각은 들어요. 제가 사람들이 모여사는 세상에서 조금 벗어나 있어서 인지는 몰라도 아, 사실 우리는 인간들이 스스로 만든 여러 장치들 때문에 기뻐하며 슬퍼하며 살고 있구나랄까. 우물 속의 개구리라고 하면 조금 비유가 될지 모르겠네요. 고민하고 걱정하고 기쁘고 우울한 모든 일들이 사실은 자연에서 오는 것이 아닌, 우물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거죠. 우물 밖으로 나오면 오히려 더 기쁘고 재미있는 일이 많을 수도 있을 텐데 하는 생각. 그리고 원래는 그런 게 ‘자연스러운 것’인데라는 생각이죠”


“자연스러운 것. 듣고 보니 그거 참 아이러니한 말이네요. 지금 이 차 안에 선생님과 저 중에 누가 더 자연스러운 사람인가 생각해 보면 그렇죠? 역설이네요. 재밌네”


그렇다. 인간의 세계에서 나는 자연스럽지 않다. 아까 그 노인의 시선처럼 나는 정신이 나갔거나 사회 부적응자거나 위험한 사람이다. 하지만 산속에서는 오히려 내가 더 자연과 어울린다. 자연스럽다는 표현은 나에게 더 어울리는 말이 분명하다. 각자 생각을 하는지 잠시 침묵이 이어진다.


“피디님”


“네?”


침묵은 내가 깼다. 말해주고 싶은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순댓국을 얻어먹고 인터뷰를 마치고 나면 그녀와 헤어질 것이다. 그전에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


“제가 다시 사람들의 세상으로 들어가려고 마음을 먹으면서 다짐한 것이 있습니다”


“어떤 거예요?”


“대충 먹고살고 매일 기쁘자”


“네? 일종에 구호 같은 건가요”


“맞아요. 그거 하나 깨달았습니다. 사람들끼리 섞여 있으면 내 삶의 기준도 타인의 기준에 맞춰집니다. 멋진 차나 집이나 이성 같은 거죠. 평균이 생기고 상중하가 생기기 마련이죠. 사람들끼리 섞여 있으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내 마음이 기쁜 상태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바로 그것이죠. 그래서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시간을 모두 보내지 않고, 기쁘게 사는 것에 더 초점을 맞춰서 살아보려고요”


“좋은 말씀이긴 한데, 대충 먹고사는 것도 쉽지가 않아요”


“물론 먹고살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합니다. 배우고 익히고,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해야 먹고살 수 있어요. 다만, 거기에 너무 빠져 있지 않겠다는 다짐입니다. 돈이 있어야 행복할 거라는 생각, 저는 거기에서 좀 많이 벗어나 있습니다. 산에서 경험을 해 봤으니까요. 그래도 저는 돈을 벌기 위해서 노력을 할 겁니다. 세상에서 살기로 마음을 먹었으니까 당연히 구성원으로 한몫을 해야지요. 시장 경제의 일원으로 돈도 벌고 쓰고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이 기뻐하고 있는가, 하루하루 만족하며 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돈과는 별개죠. 이 부분이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참 힘든 점이에요. 돈과 상관없이 기쁘고 행복할 수 있다는 것. 태어나면서부터 자본주의 시장논리에 지배를 받은 사람들에게 참 이해할 수 없는 명제입니다만, 저는 그렇게 해보려고 합니다. 산에서 3년. 제가 배운 게 있다면 그거 하나예요”


대충 먹고살고 매일 기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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