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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세이읽는남자 Jan 03. 2023

이레나 저레나 시간은 간다. 우리는 늙고.

12월 24일 금요일


테리아가 다 떨어졌다. 젠장, 편의점에 가야 한다. 지난번 보루로 산다는 게 깜박하고 갑으로 몇 개 샀더니 벌써 다 피워 버렸다.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에 나오는 주인공은 밤에 담배 사러 가기 싫어서 금연을 결심했다는데 아, 나도 진짜 이참에 끊어야 하나 정말 귀찮다. 무엇보다 싫은 것은 꼴랑 담배 하나 때문에 밖에 나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외출을 할 때는 여러 용무를 한 번에 처리해야 한다. 택배, 담배, 도시락, 맥주와 같이 생각한 것을 모두 해결하고 돌아와야 뭔가 해낸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계획대로 되고 있다는 뿌듯함에 아주 짧은 순간이긴 하지만 대견함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뭔가 빠트리거나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겼을 때는 부주의에 대한 자괴감을 느낀다.


일단 여기저기 서랍을 뒤져본다. 어딘가 남은 담배가 있을 것 같다. 그래, 어딘가 분명히 있다.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것도 같다. 테리아 블루가 세 개비 정도 남았을 때 다른 맛을 느껴보고 싶어서 테리아 블랙을 뜯은 기억이 있다. 남은 걸 모두 피웠는지 그대로 뒀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아니다, 있다. 그대로 둔 것이 확실하다. 어디에 있을까. 자주 사용하는 서랍을 모두 열어보고 외투 주머니에도 한 번씩 손을 넣어 본다. 그러다 혹시 내가 놓친 것이 있나 싶어 다시 서랍과 외투를 확인한다. 없다. 아, 남기지 않고 다 피워버렸나 보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몇 개 안 남은 건 그냥 두고 새로운 담배를 뜯는 습관이라도 들일걸. 후회가 밀려온다. 지금은 한 두 개비 정도 있으면 딱 좋겠는데 그거 피우고 나서 담배를 사러 밖에 나가면 환상적인데 아쉽다. 진짜 없나, 분명히 있는 것 같은데. 이번에는 서랍 안쪽까지 샅샅이 살펴본다. 빈 갑만 모아놓은 검은 비닐봉지 안에 손을 넣어 담뱃갑을 하나씩 쥐고 흔들어 본다. 혹시 한 개비 정도 남은 게… 있겠냐 병신. 갑자기 내가 극도로 한심해 보여서 에라, 하며 그냥 누워 버린다.


창문이 보인다. 담배 찾는다고 부산 떨 때 암막 커튼을 살짝 건드렸나 보다. 벌어진 커튼 사이 조그만 틈으로 하늘이 보인다. 맑다. 지금 한 오전 10시 정도 됐겠다. 해가 내 정수리 위를 향해서 열심히 기어 올라오고 있겠지. 우주선 안에 작은 균열을 발견한 우주인 마냥 얼른 커튼을 쳐버린다. 오늘이 며칠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별로 관심도 없다. 화요일이든 토요일이든 무슨 상관인가. 그냥 다 같은 날이지. 허무함 때문인지 좌절감 때문인지 어쨌든 잠이 스르륵 몰려온다. 그래 일단 자고 밤에 먹을거리 사러 나갈 때 담배도 같이 사면되겠다. 이불을 당겨서 덮으니 따뜻하다. 오늘 컨디션 좋으니까 저녁에는 소주도 몇 병 사야겠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고 설렌다. 눈을 감는다.


12월 24일 금요일


출근이다. 연차를 낼까 생각했는데, 내가 무슨 젊은 사람도 아니고 팀장이 크리스마스이브 타령이라니, 상무든 동료 팀장들이든 말은 안 해도 분명히 좋지 않게 생각할 것 같다. 그래, 이럴 때일수록 자리를 지켜야 속세의 이벤트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회사에 올인하는 직원처럼 보일 수 있다. 가자, 직장으로. 버스 정류장에는 줄의 첫 번째를 늘 지키는 아주머니가 이미 서 계신다. 두 번째 청년은 아직 안 왔다. 나는 항상 세 번째 자리 담당인데, 오늘은 청년의 부재로 두 번째가 되었다. 뭐 어차피 뒷자리를 선호하는 나와는 달리 그들은 버스 앞자리 사람들이라 내 경쟁자는 아니다. 추워서 조금 떨다가 버스가 도착하고, 언제나처럼 제일 뒷자리에 앉는다. 이북리더기를 꺼내서 읽는다. 다들 휴대폰을 보는 마당에 책이라니, ‘비록 같은 버스를 타고 있지만 나는 너희와 다르다’는 우쭐함이 생긴다. 버스가 지하철역에 도착한다. 삑삑삑! 카드 찍는 소리가 들리고 우르르 내리기 시작한다. 나는 가장 마지막에 내린다.


지하철 대기줄. 좌우 두 개의 문에 한 줄씩 줄을 서는데 나는 오른쪽 문에 섰다. 내 앞에 두 명이 있으니까 나는 세 번째. 그러면 왼쪽 문 앞에 서있는 사람 세 명은 왼쪽 좌석으로 이동을 할 것이고 나는 오른쪽 좌석 방향. 그럼 오른쪽 방향에 세 자리만 남아 있으면 앉아서 갈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충분히 승산이 있다. 열차가 들어온다. 창문으로 열차 안에 좌석을 확인한다. 빈자리가 네 개 정도 보인다. 굿. 타깃 자리를 정한다. 우선순위는 여성 옆자리부터. 몸집이 작아서 옆에 앉았을 때 좌석에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주의할 점은 내가 정한 타깃 자리가 대기줄 앞사람의 동선과 겹칠 때를 특히 조심해야 한다. 그럴 기미가 있다 싶으면 얼른 그다음 타깃으로 변경을 해야, 앉을 수 있다. 엇, 내가 거기 앉으려고 했는데 하는 순간 뒤를 돌아보면 모든 자리는 순식간에 다 채워져 버린다. 순발력이 관건. 문이 열리기 직전에 오른쪽 발을 뒤로 살짝 뺀다. 튀어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문이 열리고 앞사람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가자 가자 가자 빨리 가자’ 왼쪽 줄 사람들이 자리가 없어서 오른쪽 좌석 방향으로 치고 들어오기 전에 빨리 앉아야 한다. 앞에 사람아 제발 좀 빨리 움직이자. 여성 옆자리는 아니지만 일단 자리에 앉았다. 자세가 좀 어색하게 양쪽 남성들 사이에 껴있는 모습이지만 걱정 없다. 열차가 움직이면 관성의 법칙에 의해 자연스럽게 정리가 된다. 마치 쌀을 체에 담아 슬슬 움직이며 정렬을 하듯이 알아서 제 자리를 찾아가게 되어 있다. 외투 안쪽 주머니에서 이북리더기를 꺼내어 읽기 시작한다. 다음 정거장에서 사람들이 또다시 쏟아진다. 아마 가장 앞줄에서 기다린 사람들은 빈 좌석에 대한 기대가 있었으리라. 하지만 쏘리. 이미 만석. 한 20분 지났을까.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이 상태로 독서는 어렵다. 이북리더기를 외투 안주머니에 고이 넣는다.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눈을 감는다.


12월 24일 금요일


새벽 4시에 맞춰서 알람이 울린다. 벌떡 일어난다. 조금만 더 잠을, 하는 순간 지는 거라고 한다. 그야말로 탁! 소리 나면 즉시 핫! 하고 몸을 일으키라고 책에 나와있다. 효과가 분명히 있는 것 같다. 그 방법을 알고 나서부터는 아침에 일어나는 게 훨씬 수월하다. 미라클 모닝을 시작한다. ‘오늘 하루도 선물이다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류의 자기 암시를 한다. 일기 같은 글을 쓰기 시작한다. 계획이나 다짐을 빼곡히 노트에 적는다. 다음은 명상. 내 날숨과 들숨을 모두 느낀다. 숨을 따라 내 의식을 이동시킨다. 고요하다. 잠잠하고 평화롭다. 새벽 루틴 끝. 어제 쓰다 남은 소설을 살핀다. 엉망이네, 지우고 다시 쓰기 시작한다. 분명히 아이디어는 좋은데 뭐가 문제지. 커피가 문제다. 커피를 안 마셨다. 얼른 방에서 나와 주방으로 간다. 커피를 내린 후 다시 책상에 앉는다. 일단 생각나는 대로 글을 마구 써본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니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넘어 버렸다. 이제 운동이다. 가정용 워킹머신에 올라선다. 운동화를 신고 수건을 목에 두른다. 아이패드로 자기 계발 유튜브 영상을 플레이하고 헤드셋을 낀다. 애플워치 운동 앱에 실내 달리기를 선택하고 워킹머신을 작동한다. 빠르게 걷기. 30분 내외 길이 영상을 선택했으니 다 보고 나면 운동 끝. 헤드셋에 땀이 흥건하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는다. 샤워 후 간단히 빵과 우유를 먹는다. 그리고 다시 책상에 앉는다.


지금부터 일러스트 시작. 그림만으로는 경쟁력이 없을 것 같아서 ‘오늘을 소중히’와 같은 문장을 적어 넣는다.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하고 팔로워들의 게시물에 좋아요를 남긴다. 댓글도 달아야 한다. 소통이 많은 팔로워 게시물을 먼저 노출시켜 주기 때문이다. 어제 간단히 적은 수필을 카카오 브런치에 업로드한다. 오전 일과 끝. 독서를 시작한다. 물론 자기 계발서다. 대략 100권 정도는 읽은 것 같다. 이제 거의 비슷비슷한 말들뿐이다. 자기 계발서의 패턴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식이면 나도 자기 계발서 한 권 쓸 수 있을 것 같다. 그래도 좋은 문장 하나만이라도 만나면 그걸로 그 책은 성공이라고 생각하며 계속 읽는다.


래드버블과 마플샵을 차례로 확인한다. 내가 그린 그림을 합성해서 티셔츠나 굿즈에 붙여서 보여주고 고객이 마음에 들면 주문하는 식이다. 선주문 후제작 시스템이라 재고 부담이 없다. 그런데 팔린 게 없다. 그래 팔릴 리가 없지. 이런 곳의 특징이 홍보는 스스로 해야 된다는 것이다. 나를 아는 사람이 찾아서 들어와 내 물건들을 검색해야 하는데, 아직 나는 인지도가 없다. 그래, 뭐든 사업은 결국 마케팅이다. 다시 인스타그램을 연다. 저장해둔 그림을 하나 더 업로드한다. 태그를 몇 개 더 추가해 본다. 널리 널리 퍼져라. 누군가 우연히 내 게시물을 발견하고 좋아요를 누르고 팔로잉하게, 더 멀리 많이 퍼져가거라. 얼른 유명해져서 크리스마스 한정판 콘텐츠를 딱 100개만 팔 거라고 공지를 하자. 한 명당 만 원에만 팔아도 백만 원이 들어온다. 천 명이면 천 만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두 가지 감정이 동시에 찾아온다. 설렘 그리고 잠시 후 좌절감까지. 아니, 그럴 시간이 없다. 자기 계발서에서 읽은 문장을 떠올린다. 자꾸 생각하면 이루어진다는 것. 그리고 돈을 좇지 말고 꿈을 좇으라는 것. 그래, 돈이 문제가 아니다. 꾸준히 계속하는 것이 관건이다. 성과는 어느 날 갑자기 준비하고 있는 사람에게 닥친다. 그때까지는 루틴을 유지해야 한다. 마음을 다잡자. 명상을 하자. 내 안에 긍정적이고 유익한 에너지만 흐르게 해야 한다. 자세를 잡고, 눈을 감는다. 할 수 있다. 나는 반드시 할 수 있다. 어차피 시간은 계속 흐른다. 잠을 잘 때도 흐르고 울고 있을 때도 취해 있는 동안에도 시간은 그냥 계속 나를 지나간다. 시간은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하다. 무엇을 느끼고 어떤 경험과 배움을 얻을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결국,


이레나 저레나 시간은 간다. 우리는 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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