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창안에 행위 예술가
드디어 그 녀석의 핸드폰에 그랩(Grab) 연락이 왔다. 그런데 차는 오지 않고 기사의 사진만 덩그러니 떠 있다. 정말 앞이 막막했다. 나는 녀석의 휴대폰을 빼앗아 들고 그랩 존에 있는 관리인에게 무작정 건네며 통화를 시켰다. 하지만 통화를 한들 뭐 하랴. 들려오는 베트남 말은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데... 차라리 앱에 뜬 영어가 더 알아보기 쉬울 지경이었다.
무더위 속에 내가 뛰어다니는 것을 지켜보던 한 남자가 접근했다. "똑같아요!" 한국말이다! 타국에서 들리는 이 구원 같은 한국말이라니. 둘러보니 베트남 사람이다. 얼마나 그 소리를 많이 했는지 한국사람 발음인지 알았다. 그랩과 가격이 같다는 말이다.
지금 사기를 당하든 말든 상관없었다. 길거리에서 노숙하지 않고 숙소로 갈 수만 있다면 그게 어디인가. 나의 활약 덕분에 겨우 호텔로 향할 수 있었지만, 친구 녀석은 비웃는 듯했다. "기다리면 왔을 텐데 유난이다"라는 식이다.
새벽 2시,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화장실부터 확인했다. 내일의 거사를 치를 계획을 세워야 했으니까. 그런데... 이건 최악이다. 화장실 벽이 통유리다. 남자끼리니 샤워하는 모습이야 보든 말든 상관없지만, 나의 처절한 몸부림과 경건한 '종교 예식'까지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내일 아침 조식 시간에 녀석보다 먼저 내려가 처리하기로 결심했다.
녀석은 이 새벽에 무슨 샤워냐며 그냥 자자고 한다. 하지만 나는 몸살이 나도 자기 전엔 샤워를 해야 하는 강박이 있다. 땀에 젖은 몸으로 호텔 시트를 더럽힐 수는 없었다. 결국 녀석 몰래 물수건으로 몸을 재빨리 닦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시트를 더럽히지 않으려 이불 밖에서, 내 머릿기름이 배지 않게 베개를 시트 밑에 넣고 누웠다. 녀석은 눕자마자 코를 곤다. 나는 그 코 고는 박자에 맞춰 숨을 쉬며 겨우 잠을 청했다.
새벽 6시, 거사 계획이 나를 깨웠다. 녀석을 깨워 조식을 먹으러 가자니, 오히려 내 코 고는 소리 때문에 잠을 못 잤단다. 역시 두 명 중 코 고는 사람은 먼저 잠든 놈이라는 게 진리다. 녀석은 나더러 먼저 내려가란다. 호텔 뷔페 따위 먹어서 뭐 하냐는 식이지만, 본전 본능이 투철한 나는 먼저 내려가 식사를 마쳤다. 녀석보다 20분 일찍 올라가면 충분히 거사를 치를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식사를 마치고 올라온 지 얼마 안 되어 녀석이 식당으로 내려가는 걸 확인했다. 나는 곧장 유리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막중한 임무를 띠고 변기에 걸터앉았다. 걸터앉기 전, 누가 볼세라 변기 시트에 종이 커버를 조용히 놓는다. 그 위에 또 휴지를 겹겹이 깐다. 그런데 사방이 유리를 통해 훤히 보이니, 녀석이 나의 모습을 보고 불쾌해하거나 조롱할까 봐 마음이 급했다. 종이 커버는 제대로 놓이지 않고, 이중 안전장치로 깔아둔 휴지는 반으로 접히지도 못한 채 길게 늘어져 변기 안으로 빠져 들어갔다. 마음은 급한데 녀석이 오기 전에 빨리 끝내야 한다는 생각에 장은 더 긴장됐다.
한참 힘을 주는 그때,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녀석이 들어와 나를 본다. 치욕적이다. 녀석이 웃으며 말한다. "너는 볼일 보는 모습이 그렇게 자랑스럽냐? 행위예술 하는 거야? 블라인드나 내리고 해라!" 유리에 블라인드가 있었다니... 그걸 내리고 일을 이어가려 했지만 이미 흐름은 끊기고 몸은 경직됐다.
인생 최대의 위기인 변비 때문에 체중이 10kg이나 빠졌던 나다. 비행기 값과 회비가 아까워 억지로 온 여행인데 몸이 정상이 아니다. 요란하게 소리만 났다. 당황과 황당의 차이를 아는가? 볼일을 보려는데 방귀만 나오는 게 '황당'이고, 방귀만 끼려는데 볼일이 나오는 게 '당황'이다. 지금 내 상황은 명백히 '황당'이다.
창피해 죽을 것 같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결국 얻어낸 결실은 아주 조그만 피라미 한 마리... 그야말로 '태산명동 서일필(泰山鳴動 鼠一匹)'이었다. 실속 없는 망신의 대향연. 나의 비극은 그렇게 친구 녀석에게 최고의 코미디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