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단발머리, 반듯한 가르마, 뾰루지 하나 없는 투명한 피부, 또렷한 눈매, 선한 얼굴.
사랑 많이 받고 자란 막내딸 같이 밝고 명랑해 보이는 아이.
내가 본 J의 첫인상이다.
그 아이를 처음 만난 건 고등학교 입학 날이었다. 1학년 1반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J가 말을 건넸다.
“너 혹시 **국민학교 나오지 않았냐?”
“어?”
나는 국민학교 6학년 오월에 전학을 온 터라, 같은 반이 아니면 나의 존재를 아는 것은 쉽지 않은 일.
‘어떻게 나를 알지? 어디서 만났었지?’ 순간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쳤다. 당황스러운 표정이 읽혔는지 J는 특유의 눈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너 졸업앨범에서 봤어. 활짝 웃고 찍은 애. 맞지? 반갑다.”
‘아, 망했다.’
전학생이었던 나는 고무줄놀이 하나로 반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섞일 수 있었고, 학교생활도 빠르게 적응해 나갔다. 고무줄놀이는 두 편으로 나눠 발목부터 시작해서 무릎, 허리, 가슴, 어깨, 입, 귀, 머리까지 단계를 높여가며 고무줄 사이를 넘나드는 놀이인데, 난 그 당시엔 키도 큰 편이었고, 날렵하게 리듬도 곧잘 타는 편이어서 친구들에게 잘 뽑혔다. 그날도 여느 날처럼 난 점심을 빨리 먹고 우리 반 여자친구들과 운동장으로 달려 나갔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우리 편은 숨을 헐떡이면서도 구호에 맞춰 하나가 되었고, 협동심을 발휘(?)하며 정신없이 고무줄놀이를 즐기고있었다.
“선생님이 이제 그만하고 과학실로 오래. 졸업앨범 찍는대.”
‘아차!’
우리는 꽃단장은커녕 거울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과학실로 우르르 몰려 들어갔다. 그리고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차례를 기다렸다가 꾀죄죄한 모습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 모습이 우스꽝스럽다며 우리는 마지막 친구의 촬영이 끝날 때까지 웃었던 기억이 있다. 즐겁고 소중한 시간이었지만 나에겐 지우고 싶은 졸업 사진만이 남았다.
성격도 좋고, 눈썰미가 뛰어난 J는 쉬는 시간이 되면 내 옆자리로 자리를 옮겨 수다를 떨었고, 이동 수업을 갈 때도, 학원을 갈 때도 늘 함께 했다. 위로 언니가 셋이나 있는 J는 최신 트렌드와 감각적인 패션 아이템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지하상가로 쇼핑을 가면 “이건 딱 네 옷이다!”하며 옷을 골라 주었고, 옷가게 주인과 가격 흥정도 척척- 언니처럼 행동했다. 우리는 그렇게 3년 내내 붙어 다녔고, 둘만의 비밀도 차곡차곡 쌓아가며 추억을 만들어갔다. J는 대학 졸업 후 제법 큰 운송회사에 취직을 했고, 난 가끔 그녀의 회식 자리에 자연스럽게 초대받아 술을 얻어 마시기도 했다. 우리는 친자매처럼 서로의 가족 행사에 참여하기도 했었다.
J가 결혼할 오빠를 정식으로 소개한 날, 난 복잡한 감정을 숨기지 못한 채 "네가 왜?"라는 말로 친구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음을 고백한다. 그때 J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가 많이 좋아해."라고 성숙하게 대답했다. J는 지난 일에 대해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지만, 난 두고두고 후회했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또래의 아이들을 키우며 고민을 공유하고, 적어도 일 년에 두 번 이상은 만난다. 특별한 일이 없어도 난 J에게 전화를 걸어 어린시절로 돌아간듯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눈다.
J는 한결같다. 더 유쾌하고 더 성숙해졌다.
한 달 전쯤 반가운 J의 전화를 받았다.
“야! 나 아파트 당첨됐다.”
“와, 정말? 축하해. 잘됐어. 정말 잘했어. 무조건 잘했어.”
진심이었다. J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고 있기에 내 일인 양 가슴이 벅찼다.
“너는 그렇게 말해줄 줄 알았다. 내가 언니들한테 전화했더니 돈 걱정부터 하는데- 참 서운하더라. 그 말 듣고 싶어 전화했다. 고마워. 친구”
“난 네가 잘될 줄 알았다. 한 턱 쏴라!”
“그래야지”
내 친구 J는 다시 취업을 준비하고 있다. 경제적 부담이 여전히 걱정인 모양이다. 여기저기에 이력서를 넣으며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