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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도 날아간 편지

선생님에게 받은 편지

by 한그루

졸업 앨범 속에 잠들어 있던 편지는 세월 속에서 누렇게 바랬고, 초록색 잉크도 날아가 흐릿해졌다. 정리를 하다가 30년 전 나의 스승에게 받은 귀한 편지를 찾았다.

고백하건대 난 이 편지를 받고 너그럽고 좋은 어른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글쎄,...

이 아이를 표현하자면-

무엇이라고 말해야 가장 적절할까

'천사표' - 좀 지나친가?

'바보스럽게 착한 아이' - 너무 직설적이지.

'매력적인 소녀' - 좀 우습다.

'코스모스에 깃든 가을바람을 알고 늘 향기를 지닌 아이'-

'라일락 향기보다는 짙지 않으나 100m 멀리서 날아온 아카시아 내음과 함께 눈을 감고 추억해 보는

어린 날의 핑크빛 사랑 하나를 잘 아는 정적인 아이'-

'A도 B도 C도 잘 어울리고 갑도 을도 병에게도 함부로 욕하지 않고, 가도 나도 다도 다 이해하는 폭이 있고,

착하고, 하나님을 아는 소녀'-

늘 고맙다.

그렇게 열심히 뛰고, 노력하고, 살고 있음에 이 담임(?)은 늘 갈채를 보낸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금처럼 그대로 변치 말고 생활해라.

그럼 또 보자.

기도하는 마음으로 너를 지켜보고 있을게.

안녕.

94. 5. 10 밤, 선생님이


나의 고1 담임이었던 경애 선생님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것-

"짙은 뿔테 안경, 분홍 립스틱, 삐쩍 마른 몸, 단발머리, 초록색 볼펜'

지금 생각해 보면 선생님은 썩 어울리지도 않는 분홍색 립스틱만 바르셨다. 한참 멋 부릴 고교생들 눈에는 촌스러워 보였겠지만, 난 그런 담임 선생님을 참 좋아했다.

달려라하니 고은혜

경애 선생님은 초록색을 좋아했다. 출석체크를 할때도 사인을 할 때도 채점을 할 때도 빨간펜 대신 초록색 펜만 쓰셨다. 교실 뒤 환경 미화판을 꾸밀때도 초록벽 벽지를 붙이셨다. 초록색은 안정감을 주고 집중력도 높인다는게 이유였지만 성적은 선생님의 기대치(?)에 미치지는 못했던 같다.

학교 교정이 초록 빛깔 나무들로 우거졌던 1994년 5월. 난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나의 최애 선생님에게 선물 받았다. 사춘기 소녀를 운동장 스탠드로 따로 불러 롤케이크와 함께 편지를 주시며 "내가 지켜볼께."하시며 나의 어깨를 들썩이게 하셨다.


경애 선생님은 일년에 한번 있는 학교행사 '선배들의 시간'에 나를 초대하셨고 난 그렇게 몇해 선생님을 찾아 뵐 수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자주 찾아뵐 것을...선생님은 새로운 천년이 시작된다는 2000년 밀레니엄 해에 갑작스럽게 하늘로 긴 여행을 떠났다.


5월이 면,

초록 색을 보면,

분홍색 립스틱을 바를 때면,

난 선생님이 생각난다.


"선생님, 지켜보신다는 약속 잊으신 건 아니죠? 보고 싶어요. 선생님"

선생님에게서 받은 실제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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