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갈 때 꼭 꺼내 입는 특별한 옷이 있다. 사십 년 전 서울에 간 아빠가 엄마에게 선물했다는 원피스. '서울세화양장'이라는 빛바랜 택이 그대로 붙어 있는 이 옷.
사실 딱히 따숩지도 않고 나에게 썩 어울리는 것 같지도 않지만, 난 세상에 단 하나뿐인 이 옷을 좋아한다.
쭈뼛거리며 혼자 양장점에 들어가 이 옷을 골랐을 아빠를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내 기억 속에 아빠는 늘 바빴다. 합판 공장을 운영하는 젊은 사장님은 나이 많은 직원들을 다 퇴근하고 나서야 소주 한 잔 걸치고 늦은 저녁 집에 오셨다. 거래처 납기일이 가까워오면 엄마도, 삼촌도 아빠의 일을 도왔다. 나와 두 살 터울 여동생은 방학이 되면 공장 사무실에 가서 경리 언니(?)와 숙제도 하고 인형 놀이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아빠는 딸들에게는 한없이 좋은 아빠였지만 엄마에게는 그리 로맨틱한 남편은 아니었다.
그런 아빠가 엄마의 옷을? 그것도 직접?
“골라도 어디서 이런 촌스러운 옷을 골라왔는지, 디자인도 마음에 안들고, 색도 이상하고….”
아빠를 하늘로 보내고 오랫동안 밖으로 나오지 못했던 이 원피스는 다른 옷들에 섞여 엄마의 옷장을 탈출했다.
“이런 옷이 있었어?”
“니 아빤, 보는 눈도 참 없어. 몇 번 입지도 않았어. 버리려고.”
“버리긴 좀 아깝지 않아? 오래된거 같긴 한데 새 옷이네. 내가 입을까?”
“요즘 누가 그런 걸 입니? 그냥 버려.”
엄마를 많이 닮은 나는 안다. 마음에 들지 않아서 입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옷장에 고이 모셔놓고 차마 입지 못했다는 것을. 그리고 세월이 지나 이제야 버릴 용기가 생겼단 사실을 말이다.
“유행은 돌고 도는 거야. 내가 입을래~”
아빠의 마지막(?) 선물이었던 원피스를 슬그머니 내 옷장으로 데리고 왔다. 그리고 옷 한 벌 살 수 있는 비용을 들여 리폼을 맡겼다. 그렇게 나는 엄마의 추억을 입기로 했다.
이 원피스는 엄마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입지도 그렇다고 버리지도 못하고 오랜 세월 지켜만 봤을 옷. 쓰라리고 아프기만 한 상처였을까 아님 설레었던 추억도 있었을까? 궁금하지만 묻어두기로 했다.
젊은애가 궁상맞게 어울리지도 않는 옷을 입는다고 오늘도 한 소리를 들었지만 엄마를 생각하며 이 옷을 골랐을 아빠의 마음을 생각하고 의미를 부여하니 패턴도 기장도 색상도 내 마음에 든다. 엄마 추억에 나의 이야기를 더해 오래오래 입어줄 생각이다. 올해도 난 엄마의 추억으로 또다시 따뜻한 겨울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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