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선생의 파란만장한 일생
김 선생은 정직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귀가 얇고
인정이 많아
사기를 많이 당했단다
부농이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외삼촌이 조카들 땅을
노름으로 날리기도 했지만
학교선생을 하며
과수원과 주유소도 가진
시골유지였다
헌병으로 복무했고
5.16 군사정변 때 잡혀가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했다
대학생 때는 전단을 뿌리다
형무소에 복역도 했단다
시골에선 엘리트여서
단위 농협 이사도 하고
학교를 사라고
권유받기도 했으나
학교장사로 이익 보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고 하며
거절했단다
기초단체장 출마를
권유받기도 했고
딸만 있으니
첩을 두라는
소리까지 들었단다
그러다가
학교를 그만두고
사업에 뛰어들어
고생길이 시작되었단다
60년대에
대구로 이사 와서
인쇄소와 출판사를 하며
가난한 선생들의 책은
무료로 만들어주기도 했단다
낙동강하구 간척사업도 했고
금광사업으로
사기도 당했고
부산에서는
시장을 짓기도 했단다
그때 우리나라에선
자동차를 못 만들어
일본에서
중고 트럭을 수입해서
김해공항 건설공사에
자갈을 납품하는 등
뜬구름 잡는 여러 사업들로
사기 부도
모든 풍파를 겪었다
당시에는
대법원까지의 재판이
10년이 걸렸단다
가족들은 집에서 쫓겨나
시골 친척집으로 향했고
딸들은 학교도 못 다녔단다
그래도 시장을 지으며
동생들에게 가게를 주어
나중에는 형제들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사농공상이라는
선비의식이 있어
쌀장사하자는 동생말에
장사는 못하겠다고 했단다
남편은 사업한다고
늘 나가있고
혼자 자식 키우며
맏이 장손집이어서
그 당시 5대조까지
한 달에 한 번씩 있던
제사를 모시느라
부인의 고생이 심했다
나중에 박정희 대통령이
3대조까지만
제사모시라고 했단다
김 선생의 유명한 일화는
한 사람에게 3번이나
사기를 당한 것이란다
사기꾼 집에 찾아가니
밥 굶는다는 소리에
주머니 돈을 털어
쌀을 사주고 온 일도
있었단다
금형 제작 공장 등
여러 가지 사업을 하며
가족을 건사하려 노력했으나
부인을 사별하고
몇 년 후 세상을 떠나셨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