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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똥꽃 Aug 13. 2020

남의 눈에 눈물, 지 눈에 피눈물

두 여자의 복수

유럽으로 해외근무를 떠나는 남편과 출국 준비 중인 지인을 만났다. 1차는 저녁 2차는 치맥. 사실 저녁을 먹으면서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는데 나의 별 볼 것 없는 주량으로는 1차에서 마신 맥주로도 충분했다. 그녀와 나의 공통점은 한민족이라는 점, 아이 딸린 유부녀라는 점, 외국 생활 경험이 있다는 점, 서울에서 산 적이 있다는 점을 빼면 그다지 없다. 그녀는 나보다 나이가 많아서 약간 어려운 점도 없지 않아 있었다.


맥주잔을 채워 주며 서로의 근황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두 중년 여인네들의 과거사와 현재사가 빠르게 펼쳐진다. 기쁘고 슬프고 답답한 인생 이야기를 꾹꾹 눌러 잔을 채우고 식당 주인이 구워다 준 삼겹살을 안주 삼아 마신다. 식당에 옛날 음악이 조용히 흐르고 나는 요새 트롯이 좋다고 말했다. 그녀가 미스터 트롯 중에 누가 좋냐고 묻길래 나는 그중 나의 원픽이 태권 트롯 나태주라고 했다. 그렇게 말을 한 지  채 1분도 안 돼서 가게 안에 나태주의 노래가 들린다. 눈치의 달인이신 그곳 사장님은 곧 대박 나실 것 같다. 그녀는 나에게 오페라를 좋아하냐고 물었다. 나는 오페라는 너무 고상해서 부담스럽다고 했다.


사실 그녀와의 만남은 처음이 아니다. 전에도 같이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고, 우리가 나눈 이야기의 절반 이상은 이미 전에 다 했던 말들이다. 알면서도 또 하고 알면서도 또 듣는다. 둘 다 자신의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나 보다. 나는 요즘 층간 소음 때문에 괴롭다고 했다. 배 째라는 이웃과 딱히 해결 방법이 없는 내 처지를 그녀가 안타까워하길래, 내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남의 눈에 눈물 나게 하면 지 눈에는 피눈물 난다는 걸 오늘 확실히 알게 됐어요."


그러자 그녀도 정말 맞는 말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녀를  모함해서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었던 그녀의 원수가 최근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말했다. 그녀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나도 그날 우연히 그간 나와 가족을 괴롭히던 한 사람이 최근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인이 사고를 당하거나 병에 걸리면 불쌍한 마음이 들어야 하는데, 그 사람들이 가해자일 경우에는 내 맘이 어쩐지 편해지는 게 인지상정인가 보다. '주는 대로 받는구나!'라는 그런 느낌.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언젠가 정의는 구현된다라는 믿음도 생긴다. 그녀가 곧 이렇게 말했다:


"내 손으로 복수하는 건 하수들이나 하는 짓이에요. 고수는 자기 손 더럽히지 않고 다른 어떤 상황에 의해서 그 사람이 벌을 받게끔 해야죠."


기독교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 하고 불교에서는 <내 탓이요> 하는데 나는 둘 다 못하고 그저 분노한다.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면 성인군자가 아니겠는가?


그다지 새롭지도 않은 얘기로 둘이서 맥주 여섯 병을 비우고 만난 지 여섯 시간 에 우리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앞으로 그녀와 다시 만날 날이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가 그날 나눈 이야기 중에 제일 기억에 남는 건 둘 다 남의 눈에 눈물 나게 한 사람이 지 눈에 피눈물 나는 것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누군가에 당했다고 아니면 당하고 있다고 너무 분해하지 말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남의 눈에 눈물 안 나게끔 선하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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